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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맥너니: 오늘의 에세이-당신은 왜 당신의 뇌가 아닌가

 

육화된 인지에 대한 간략한 안내문: 당신은 왜 당신의 뇌가 아닌가

A Brief Guide to Embodied Cognition: Why You Are Not Your Brain

 

―― 새뮤얼 맥너니(Samuel McNerney)

 

육화된 인지, 즉 마음은 육체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육체도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관념은 인지과학에서 반직관적인 관념들 가운데 하나다. 현저한 대조를 보이는 것은 이원론인데, 이것은 17세기에 르네 데카르트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유명한 마음의 이론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육체는 본성상 항상 분할될 수 있고 마음은 전적으로 분할될 수 없는 한, 마음과 육체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인간의 마음 또는 영혼은 육체와 전적으로 다르다." 앞선 세기들에서는 탈육화된 마음이라는 관념이 번성했다. 그것으로부터 서양 사상은 두 개의 기본적인 관념을 발달시켰다. 마음이 탈육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성은 탈육화되어 있고, 그래서 이성은 초월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렇지만, 조지 레이코프와 라파엘 누네즈가 설명하듯이,

 

인지과학은 이런 총체적인 철학적 세계관을 경험적 근거에서 의문시한다... [마음은] 우리의 뇌, 육체, 그리고 육체적 경험들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우리가 추리하는 데 육체가 필요하다는 무해하고 명백한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 자체의 바로 그 구조가 우리 육화의 세부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각 체계, 우리의 운동 체계, 그리고 신경 결합의 일반 메커니즘의 세부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인지가 우리의 피질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인지는 물리적 세계 속에서 우리가 겪은 경험들의 영향을 받으며, 아마도 그것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무언가가 "우리 머리 위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무언가를 보지 못하는 물리적 무능력과 불확실하다는 심적 느낌을 활용하고 있다. 또는 우리는 왜 애정으로 따뜻함을 이해하는가? 유소년 시절에 주관적인 애정 판단은 거의 항상 따뜻함이라는 감각에 대응했고,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따뜻하게 대하고 있어" 같은 은유들을 낳는다.

 

육화된 인지는 역사가 비교적 짧다. 그것의 지적 근원은 20세기 초 철학자들인 마르틴 하이데거, 모리스 메를로 퐁티, 그리고 존 듀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최근 수십 년 동안 경험적으로 연구되었을 뿐이다. 육화를 경험적으로 연구하는 핵심적인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 버컬리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의 조지 레이코프 교수다.

 

레이코프는 친절하게도 최근의 전화 통화에서 몇 가지 질문에 응대했는데, 그 통화에서 나는 그의 흥미로운 역사를 직접 알게 되었다. 레이코프는 1960년대에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그는 결국 이 대학에서 영문학과 수학을 전공했다―에서 촘스키의 언어학 강좌들을 수강한 후에 인디아나 대학교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연구했다. 그 당시는 다른 세계였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 당시에 컴퓨터과학과 인공지능 분야가 개시되었으며, 사유는 형식 논리로 서술될 수 있을 것이라는 관념이 대부분의 철학적 사유를 지배했습니다. 튜링 기계가 인기 있는 토론 주제였으며, 뇌는 대체로 디지털 계산 장치로 이해되었습니다." 본질적으로 마음은 뇌를 범용 하드웨어로 갖춘, 육체와 분리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간주되었다.

 

언어를 일련의 무의미한 기호들로 파악하는 촘스키의 언어 이론은 이 패러다임에 적합했다. 그것은 문법이 의미나 소통과 무관하다는 언어관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63년에 레이코프는 문법이 의미에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찾아내었다. 이런 관찰로부터 레이코프는 논리적 구조들이 문법 자체로 구성되는 생성의미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이것도 탈육화되어 있었다―을 만들어내었다.

 

확실히 인지과학자들은 데카르트 같은 이원론자들은 아니었지만―사실상 그들은 마음이 육체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지 않았다―육체가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코프가 마음을 컴퓨터로 간주하는 것의 결점들을 깨닫고 육화를 연구하기 시작한 떄가 이 시기―60년대와 70년대 전체에 걸친―동안이었다.

 

전환점은 1975년 여름에 버컬리에서 개최된 육화된 언어을 암시하는 네 번의 강연에 참석한 후에 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강연들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언어학과 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와 일단의 동료들로 하여금 인지언어학을 시작하도록 촉구했는데, 인지언어학은 촘스키적 이론과 컴퓨터 패러다임으로서의 마음 전체와는 대조적으로 "의미론은 육체의 본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 1978년에 그는 "우리가 은유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발견했"고, 발견할 수 있는 한 많은 은유들을 수집하느라고 그 다음 해를 보냈다.

 

은유에 관한 레이코프의 연구가 철학과 언어학에서 대부분의 주류 사상에 대립적이었지만 많은 인지과학자들은 그의 연구를 수용했다. 마크 존슨의 전화를 받았던 1979년 1월 2일에 레이코프는 행운을 붙잡았다. 그 전화 통화에서 마크 존슨은 레이코프에게 자신이 여섯 달 동안 철학과에서 누군가를 대신하기 위해 버컬리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존슨은 대륙철학을 연구한 시카코 대학에서 막 박사학위를 받았던 참이었고, 레이코프가 은유를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전화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인지과학에서 꽤 획기적인 책들 가운데 하나였다. 1979년 봄에 철학 저널에 투고한 논문을 공동으로 저술한 후에, 레이코프와 존슨은 <<삶으로서의 은유(Metaphors We Live By)>>에 관해 작업하기 시작하여 삼 개월 후에 그 책의 저술을 끝냈다.

 

그들의 책은 우리가 어떻게, 언제, 그리고 왜 은유를 사용하는지 폭넓게 검토했다. 여기에 몇 가지 예들이 있다. 우리는 통제하는 것을 에 있는 것으로, 통제받는 것을 아래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보다 에 있다." "나는 상황의 꼭대기 있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 있다." "그는 강함에 있어서 나보다 상위에 있다." "그는 내 통제 아래 있다." "그의 권력은 내리막길에 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사랑을 물리적 힘으로 서술한다. "나는 우리 사이에 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불꽃이 일어났다." "그들은 즉시 서로에게 끌렸다." 그들의 예들 가운데 몇 가지는 육화된 경험을 반영했다. 예를 들면, "오늘 나는 고양된 기분이다"라는 표현과 "나는 쓰레기장에 떨어진 기분이다"라는 표현에서처럼, 행복은 위고 슬픔은 아래다. 이런 은유들은 폴 에크먼 같은 연구자들이 발견한 정서의 생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에서 행복한 사람들은 웃으며 생기가 도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슬픈 사람들은 축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삶으로서의 은유>>는 게임을 바꾸었다. 그 책은 일상 언어에서 은유들이 얼마나 만연하는지 예시했을 뿐 아니라, 이성은 의식적이고 아무 정념도 없다는 관념과 언어는 말하고 듣는 기관들을 제외하고는 육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관념을 비롯하여 서양 사상의 많은 주요한 신조들이 올바르지 않다는 점을 시사했다. 요약하면, 그 책은 "우리가 그것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우리의 일상적인 개념적 체계가 본성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라는 점을 예증했다.

 

<<삶으로서의 은유>>가 출판된 후에, 강단에서 육화는 서서히 탄력이 붙었다. 1990년대에 크리스토퍼 존슨, 조셉 그래디, 그리고 스리니 나라야난의 박사학위 논문들은 일차적 은유들에 대한 신경 이론을 낳았다. 그들은, 따뜻함이라는 은유로서의 애정이 예시하듯이, 우리 언어의 대부분이 생의 처음 몇 년 동안 겪는 물리적 상호작용들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예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위를 통제하는 것으로, 그리고 아래를 통제받는 것으로 동일시하는데, 더 강한 사람들과 객체들이 우리를 통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혈압과 물리적 통제력의 상실이라는 견지에서 분노를 은유적으로 이해하는데, 화가 날 때 우리의 생리가 변하기 때문으로, 예를 들면, 피부 온도가 상승하고, 심장 박동수가 증가하며, 그리고 물리적 통제가 더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과 함께 다른 작업 덕분에 레이코프와 존슨은 <<몸의 철학(Philosophy in the Flesh)>>을 출판하게 되는데, 이 책은 육화된 은유들의 전 체계들을 상세히 논의하고, 게다가 철학적 이론들 자체가 은유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서양철학의 토대에 이의를 제기하는 육백 쪽의 대작이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마음은 본질적으로 육화되어 있고, 사유는 대체로 무의식적이며, 그리고 추상적 개념들은 대체로 은유적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로 얻게 되는 것은, 인지가 육체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은 추상적 법칙들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관념이다(몇 년 후에 레이코프는 라파엘 누네즈와 함께 고등 수학도 육체와 육화된 은유적 사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상세히 논증하는 책 <<수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Where Mathematics Comes From)>>을 출판했다).

 

레이코프가 지적하듯이, 은유들은 단순한 언어와 문학적 장치들을 넘어서는데,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개념적이고 뇌에서 물리적으로 표상된다. 그 결과, 그런 은유적 뇌 회로는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일 대학의 심리학자 존 바그에 의해 수행된 연구에서 차가운 커피잔들을 쥔 참여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따뜻한 커피잔들을 쥔 참여자들이 단지 간략한 상호작용 후에 어떤 일원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는 개연성이 더 높았다. 마찬가지로, 토론토 대학에서 "피험자들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거나 아니면 사회적으로 무시당한 때를 떠올리라는 요청을 받았다. 따뜻한 인정의 기억을 떠올린 사람들은 차갑게 무시당한 기억을 떠올린 사람들보다 방의 온도를 평균적으로 5도 더 따뜻하게 판단했다. 애정은 따뜻함이라는 또 하나의 효과." 이것은 우리가 물질적으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대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지난 몇 년 동안 보충 연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일차적 경험들에 정초하고 있다.

 

- 미래에 관해 생각하는 참여자들은 몸을 앞으로 조금 숙이는 반면에 과거에 관해 생각하는 참여자들은 몸을 뒤로 조금 숙였다. 미래는 앞에 있다.

 

- 부드러운 공을 꽉 쥐고 있는 피험자들은 중성의 얼굴들을 여성의 얼굴로 지각하는 반면에 딱딱한 공을 꽉 쥐고 있는 피험자들은 중성의 얼굴들을 남성의 얼굴로 지각했다. 여성적인 것은 부드럽다.

 

- 더 무거운 클립보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은 화폐가 더 가치 있으며 자신들의 의견과 지도자들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중요한 것은 무겁다.

 

- 한 시험에서 불륜이나 사기 같은 도덕적인 일탈에 관해 생각하도록 요청받은 피험자들이 좋은 행동에 관해 생각했던 피험자들보다 실험 후에 소독된 옷을 요청하는 확률이 더 높았다. 도덕은 순수성이다.

 

이와 같은 연구들은 레이코프의 처음 직감―우리의 합리성은 방대한 은유적 사유 체계를 통해서 우리 육체 대부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을 확증한다. 관념들이 육체에 의해 형성된다는 관찰이 우리가 장차 뇌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

 

또한 나는 버나드 칼리지에서 가르치고 있는 심리학 조교수 조슈아 데이비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육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는 데이비스에게 육화 연구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물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설명했다. "수십 년 동안 육화에 관한 많은 관념들이 사용되었고, 그것들은 임계 크기에 이르렀다... 감각적 입력과 운동 출력들은 부차적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인지적 과정들에 중추적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계산 이론들이나 심지어 행동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가 말했듯이, "행동주의와 계산 이론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육화를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여긴다."

 

이 패러다임은 정확히 어떤 모습일 것인가? 그것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나는 레이코프로부터 버컬리 대학의 새로운 뇌, 언어, 그리고 사유 센터를 통해서 "신경과학을 언어와 사유에 관한 신경 이론과 결부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흥미가 일었다. 바라건대, 데이비스 같은 젊은 교수들의 연구와 더불어 레이코프의 연구 덕분에 우리는 뇌를 우리 피질에 한정되지 않는 훨씬 더 거대한 동역학적 체계의 일부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