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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루만의 탈인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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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만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가장 단호하게 탈인간주의적인 사상가로 서술되곤 했다. 왜 이럴 수 있었는가? 루만의 사회학의 핵심 테제는 인간들이 사회적 체계들의 환경에 속한다는 것이다. 루만이 이렇게 말할 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는 사회적 체계들이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의미한다. 인간들은 사회적 체계들에 대한 필요조건이지만(어떤 화학물질들이 DNA에 대한 필요조건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럼에도 인간들은 사회적 체계의 외부에 존재한다. 루만의 경우에, 사회적 체계들은 인간들이 아니라 소통들로 구성되어 있다. 루만의 경우에, 소통들은 소통들과 소통한다. 소통들은 이 사람으로부터 저 사람에게 송신된 메시지들이 아니다. 오히려, 소통들은 항상 소통들에 반응할 뿐이다. 루만에 따르면, 인간들은 사회적 체계들을 섭동할 수 있지만, 그들은 사회적 체계들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작동하는 방식의 동학을 이해하고 싶다면, <<대중매체의 현실>>과 <<사회적 체계들>>을 읽어보라.

 

그런데 왜 루만의 이론적 입장은 탈인간주의적인가? 인식해야 할 첫 번째 것은 그것이 반인간주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루만은 인간(그가 "개별적인 심리적 체계"라고 부르는 것)들의 현존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는 인간들을 사회적 및 언어적 체계들이나 권력의 산물들로 환원시키지도 않는다. 개별적인 심리적 체계들은 어느 모로 보나 루만의 여느 다른 체계만큼이나 실재적이다. 공교롭게도 인간들이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뿐이다. 인간주의 또는 인류중심주의를 탈인간주의와 비교함으로써 그 점에 관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주의적 및 인류중심주의적 접근방식들이 그렇게 규정되는 까닭은 그것들이 인간적 체계(개별적인 심리적 체계)들을 무엇이든 모든 관계들의 본질적인 구성 성분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인류중심적이거나 인간주의적인 접근방식에서는, 예를 들면, 인간들이 사회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인간들이 어떤 특수한 형태의 기술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인간들이 다른 생명 형태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등을 묻는다. 그 방정식―메이야수가 "상관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항상 우리가 "인간들이 x와 관련되어 있는" 방식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루만의 접근방식을 매우 다르게 만드는 것은, 그는 사회가 어떻게 그렇고 그런 현상을 경험하고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지 묻는다는 점이다. 루만은 사회를 나름대로의 유기체 또는 존재자로 다루며, 그리고 이 존재자가 주변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궁금해 한다. 여기서 소통은 더 이상 어떤 사람의 믿음이나 표상의 사례로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수한 존재자의 다른 구성 요소들(다른 소통들)과  그 존재자의 시간에 따른 자기 (재)생산 가능성을 줄이거나 높이는 특수한 방식으로 공명하는, 그 존재자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저런 사람이 이런저런 소통을 왜 믿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그런 특수한 사건이 이런 조립체, 체계, 또는 객체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묻는다. 여기서 우리는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가 "표면"이라고 불렀던 것을 만난다. 그러므로 루만의 탈인간주의는 그가 체계 지시들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방식에 놓여 있다. 루만의 경우에, 사회는 나름대로 하나의 체계 또는 객체로 진지하게 간주된다. [...] 이제 문제는 인간들이 x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라는 의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교실 또는 수업은 교사 또는 교수와 학생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나름대로 소통 사건들과 관계를 맺는 나름대로의 유기체, 체계, 또는 존재자다. 교수와 학생들 모두는 그들이 지배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 객체 또는 체계의 동학에 휘말리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교수법과 구성 이론가들은 학생과 관련하여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또는 교수가 어떻게 개입하는지에 관해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객체에 의해 규정되는 연결망에서 소통 사건들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여기서 수업 자체가 존재자이고, 선생과 학생들은 이 존재자의 환경에 속한다. 그들은 문자 그래도 수업의 외부에 존재한다. 수업에서 존재하는 것은 그것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통 사건들이다. 선생과 학생들은 그 체계의 내부에서 새로운 사건들을 생성하도록 이 객체를 섭동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체계는 이런 사건들을 어떻게 대사하는가?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이것이 맞다면, 정치의 문제는 두드러지게 변화한다. 여기서 나는 정치가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적 테제를 제안하고 있지 않다. 나는 정치 이론이 고려할 필요가 있는 그런 종류들의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믿음과 규범들이 정치에 개입되는 모든 행위자들이라면 좋겠지만, 법인 기업, 저항 운동, 민족 등이 모두 나름대로 객체, 존재자, 또는 체계들이라는 점이 참이라면, 이제 우리는 인간(개별적인 심리적 체계)들이 그것들 자체의 원리와 과정들에 따라 기능하는 다른 체계들의 궤도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라투르가 서술하듯이,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은 조종사가 아니라 미합중국 공군이다. 데란다가 서술하듯이, 그렇고 그런 전쟁 기계는 무엇을 "원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자체를 재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의존하지만, 우리의 존재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가 씨름하는 일련의 존재자들을 인식한다. 우리는 이런 존재자들에 개입할 수 있는 정치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 나의 경우에, 흔히 문제는 자체의 "끌림의 체제(regime of attraction)" 안으로 인간 육체들을 포획해버린 객체들을 파괴할 수 있는 방식이다. 우리는 우리의 섭동들을 소통들로 변환시키고, 매우 많은 우리 동물들(인간들과 벌들 공히)의 목적에 대립하는 방식들로 우리를 자체의 자기생산적 재생산에 사용하는 이런 끔찍한 기계들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내게는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이런 객체들에 관한 것과 우리가 그것들에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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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