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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거팅: 오피니언-과학은 의식을 설명할 수 있는가?

 

메리와 좀비: 과학은 의식을 설명할 수 있는가?

 

―― 게리 거팅(Gary Gutting)

 

우리가 과학을 신뢰하는 까닭은 과학의 주장들이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험 자체는 과학적 이해의 객관성을 벗어나는 듯 보이는 주관적 현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들―적색을 보는 것, 고통을 느끼는 것, 사랑에 빠지는 것, 기타 등등―이 원칙적으로는 과학이 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뇌 같은 물리적 체계들에 의존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경험 자체가 물리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확실히 경험은 객관적인 물리적 사실과 상관되어 있지만, 주관적 현상으로서 그것이 어떻게 그런 사실일 수가 있을까? 내가 심한 고통을 느낄 때, 과학자들은 내 고통을 야기하는 뇌-사건들을 관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느끼는 바로 그 고통은 관찰할 수 없다. 과학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공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은 사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적절한 개념들이 없기 때문에 경험이 어떻게 물리적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과학자들이 생화학의 개념들을 개발하고 나서야 많은 사람들이 유기체들이 어떻게 전적으로 물리적일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 생각은 훨씬 더 그럴듯하다. 미래의 과학적 발전 덕분에 우리는 경험이 어떻게 전적으로 물리적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최근의 가장 흥미로운 철학적 논의들 가운데 일부가 경험은 물리적일 수 없다고 시사하는 두 가지 사고 실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사고 실험들은 그 쟁점을 결코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소수의 철학자들을 납득시켰으며, 그리고 경험이 전적으로 물리적이라는 주장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했다.

 

먼저, 색 지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메리를 생각하자. 색의 신경과학이 본질적으로 완성된 미래의 어느 시기에 메리가 살고 있으며, 그래서 그는 색과 색 지각에 관한 모든 물리적 사실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메리는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색맹이었다. (여기서 나는 그녀가―모호한 이유 때문에―전적으로 흑백의 환경에서 살고 있었던 이야기의 표준 형식에서 벗어난다.)

 

운이 좋게도, 메리 자신이 수행한 연구 때문에 그에게 정상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수술이 존재한다. 붕대가 제거된 후에 메리는 방을 둘러보며 그의 남편의 보낸 빨간 장미꽃 다발을 인식한다. 그 순간 메리는 최초로 적색을 경험하고 이제 적색이 어떠한지 알게 된다. 그의 경험이 그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색에 관한 사실을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 분명한 듯 보인다. 그런데 이 경험 전에 그는 색에 관한 모든 물리적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물리적이지 않는 색에 관한 사실이 존재한다. 물리과학은 색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표현할 수 없다.

 

이제, 좀비를 생각하자. 뇌를 먹는 영화의 좀비가 아니라, 여러분이나 나와 물리적으로 동일하지만 주좐걱인 내부 경험이 전혀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철학적 좀비를 생각하자. 예를 들면, 어떤 다른 우주에서 그저 유전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물리적 세부 사항에 있어서 동일한―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배열된 완전히 똑같은 종류들의 기본 입자들로 이루어진―여러분의 쌍둥이가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 쌍둥이가 아무 경험도 없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우리 세계에서는 자연 법칙들이 어떤 객관적인 물리적 구조들이 그것들에 대응하는 주관적 경험들과 상관되어 있다는 점을 요구하는 것이 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연 법칙들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다(그것들이 그렇다면, 우리는 논리학이나 수학의 법칙들을 발견하듯이, 경험적 사실들에 무관하게, 순수한 사유에 의해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우주에서는 물리적으로 나와 동일하지만 아무 경험도 없는 존재자―나의 좀비 쌍둥이―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좀비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당연히 내 경험은 나의 물리적 구성을 넘어서는 것을 포함하게 된다. 나의 좀비 쌍둥이가 나의 물리적 구성 전체를 공유하지만, 내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물리과학이 내 경험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사고 실험들이 설득력이 있다고 깨닫는 철학자들이 그 어떤 의미에서도 경험이 물리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식할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적색을 인식하는 것은 망막을 때리는 광자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실제로 주관적인 색 감각을 지각하기 전에 망막 정보를 처리하는 일련의 물리적 사건들이 이어진 후에 이루어진다. 순전히 물리적인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보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감시 카메라가 방에 들어오는 사람을 "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보고 있는" 카메라는 그 어떤 주관적 경험도 없다. 그것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어떠한지에 대한 그 어떤 현상적 의식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카메라가 기록한 것을 바라볼 때에만 일어난다. 경험은 물리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이런 의미의 경험에만 적용된다. 그런데, 물론,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풍성한 내부 경험을 구성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경험이다.

 

또한, 이 사고 실험들이 영혼 또는 어떤 다른 종류의 초자연적 존재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은 거의 없다. 메리 시나리오를 최초로 제시했던 프랭크 잭슨과 좀비 사례의 가장 영향력 있는 표현을 제시했던 데이비드 찰머스는 여전히 철학적 자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적 세계를 넘어서는 세계는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들의 주장은 이 세계가 물리적 설명 범위를 벗어나는 자연적 실재(의식)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찰머스는, 의식에 대한 자연적 설명을 제시할 수 있게 할, 환원 불가능한 주관적(현상적) 특성들을 지닌 존재자들을 가정함으로써 물리과학을 보충하려고 시도하는 "자연주의적 이원론"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놀랍지 않게도, 잭슨의 논변과 찰머스의 논변을 자연적 신체와 초자연적 영혼의 전통적인 이원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기는 철학자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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