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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마이클 존슨: 오늘의 에세이-부의 복음, 영장류 불평등 시험에서 떨어지다

 

부의 복음, 영장류 불평등 시험에서 떨어지다

The Gospel of Wealth Fails the Inequality Test in Primates

 

―― 에릭 마이클 존슨(Eric Michael Johnson)

 

공정성이 사회 계약의 기초이다. 시민들로서 우리는 자신의 공정한 몫을 기여할 때 자신의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기대한다. 사회적 편익들이 불평등하게 나누어지거나 또는 사전 합의가 존중되지 않을 때, 그것은 의무 불이행을 나타낸다. 이것에 근거를 두면, 그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행정부가 미합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기관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한 반면에 수만 명의 주택소유자들(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동일한 기관들의 희생자들이었다)은 집에서 쫓겨나서 오도가도 못하게 버려졌을 때, 미국인들이 분노했던 것은 정당했다. 그것은 정실주의, 부패 자금에 의한 정치 부패의 기미가 있었으며, 또한 그것은 명백히 불평등했다. 그런데 그것이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아닌가? 우리가 어린 시절에 매우 흔히 들었듯이, 삶은 불공평하다는 것이 참이 아닌가?

 

미합중국의 금융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고 오늘날의 경제 엘리트도 그의 모범을 좇았다. 1889년에 카네기는 그릇된 형식의 다윈주의를 사용하여 그의 경제적 견해의 초석이 되었던 "경쟁의 법칙"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세계는 힘이 정의이고 대마불사가 골칫거리가 아니라 성공의 열쇠인 세계였다. "부의 복음(Gospel of Wealth)"에서 카네기는 이 자연 법칙이 최소한 우리들 사이에서 견고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모든 부문에서 적자생존을 보증한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의 거대한 불평등, 기업, 산업, 그리고 상업의 소수에의 집중, 이들 사이의 경쟁 법칙을 우리가 순응해야 하는 조건으로, 그리고 유익할 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 진보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환영해야 한다.

 

달리 말해서, 카네기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삶은 불공평하고 우리는 사회 계약에 상관없이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낫다.

 

월 스트리트의 콘크리트 정글에서 살고 있는 영장류 사이에는 이 관점이 흔한 것일 것이지만, 그것은 더 일반적으로 자연 세계에 대해서는 들어맞지 않는다. 다윈은 진화에서 경쟁이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다. 그가 보기에, 협동, 공감, 그리고 공정성이 생명의 진화에 대해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가장 공감적인 구성원들이 가장 많이 있는 공동체들이 가장 잘 번성할 것이고, 가장 많은 수의 자손을 기를 것이다."

 

협동적으로 일을 함으로써, 자원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리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득을 본다고 보증함으로써, 초기 인간 사회들이 구성원들이 자신에게만 신경 쓰는 사회들보다 더 "적합"할 것이라고 다윈은 주장했다. 러시아의 자연학자 표트르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은 다윈의 작업의 이 측면을 지지했고 상호부조가 사회적 포유류 전체의 진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다윈과 크로포트킨의 시대에는 이런 주장들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연구가 초기 상태였지만, 최근의 연구는 자연 세계에 대한 이런 견해를 뒷받침했다. 그런데, 특히 한 연구가 점점 커지는 이 지식 체계에 또 하나의 판자를 덧붙였고,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카네기가 믿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삶이 결국은 그렇게 불공평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시사한다.

 

<<동물 행동(Animal Behavior)>>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공정성은 인간의 사회 계약에 본질적일 뿐 아니라, 더 일반적으로 비인간 영장류의 삶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사라 F. 브로스넌(Sarah F. Brosnan)과 공동연구자들은 텍사스 대학에서 사육되는 일단의 침팬지들에 대해 그들이 불공평한 자원 분배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일련의 행동 시험을 수행했다. <<네이처(Nature)>> 저널에 발표했던 이전의 연구에서 브로스넌과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꼬리감기원숭이들이 그들 집단의 다른 한 구성원이 더 좋은 메뉴(한 조각의 오이 대신에 한 송이의 포도)를 동시에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음식 메뉴를 거부할 것이라는 점을 알아내었다. 어떤 개체들은 음식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연구자들의 얼굴에 되던졌다. 그 원숭이들은 무언가가 불공평하다는 점을 인식한 듯 보였고 그들은 그것에 맞춰 반응했다. 이것은 도발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사회 계약의 기초가 우리의 진화적 사촌들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

 

음식에 관한 한 침팬지들은 매우 개체주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 브로스넌과 공동연구자들은 이런 이전 결과들이 더 경쟁적인 종에서 반복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우선 그 연구자들은 모두 16마리의 침팬지들을 훈련시켜 먹을 수 없는 교환권을 먹을 것과 교환하도록 한 다음에 그들의 음식 선호를 평가했다(침팬지들은  비슷한 크기의 당근 한 조각보다 포도를 항상 선호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단순한 화폐로 그들은 각 교환권이 하나의 먹을 것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은 기대에 차서 그것을 연구자들에게 열렬히 건넸다. 일단 모든 침팬지들이 개별적으로 관련성을 파악하게 되면, 연구자들이 짝을 동반했을 때 나타나는 그들의 반응들을 가늠할 수 있도록 그들은 자신들의 교환권들을 음식과 교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험 지역에 짝을 지어 들어가게 된다.

 

첫번째 시험에서는 두 침팬지가 자신들의 교환권을 교환했을 때 둘 다에게 같은 먹을 것이 주어진다(때로는 가치가 높은 포도, 때로는 가치가 낮은 당근 조각). 이것은 제어 실험의 역할을 수행했고 이어지는 시험들과 비교하는 데 사용되었다. 연구자들이 불평등 시험이라고 불렀던 두 번째 시험에서는, 쌍 가운데 한 구성원만이 포도를 받았던 반면에 나머지 한 구성원은 당근을 받았다. 세번째 시험에서는, 처음에 두 개체 모두에게 포도를 보여준 다음에, 일단 그들이 자신들의 교환권을 건넸을 때 그들은 당근을 받았다. 각 시험에서 연구자들은 침팬지들이 먹을 것을 거부하는 횟수를 기록한 다음에, 그들이 다른 보상을 받았을 때 다르게 행동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이것을 제어 실험과 비교했다.

 

아마도 놀랍지 않게도, 침팬지들은 꼬리감기원숭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으며, 그들은 자신의 짝이 같은 가격으로 맛있는 포도를 받았을 때 자기만 당근을 받는다면 거부했다. 76번의 시험으로부터 침팬지들은 둘 다 가치가 낮은 동일한 먹을 것을 받았을 때와 비교하여 이런 시험들에서 당근을 거부하는 확률이 두드러지게 더 높았다. 마찬가지로, 두 개체가 모두 처음에 포도를 보고 난 후에 당근을 받았을 때, 그들은 더 나은 보상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제시받지 못했던 경우들보다 거부하는 확률이 두드러지게 더 높았다. 요컨대 상황이 공정하지 않으면 역정이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섬뜩하게 친숙한 듯 들리다면 매우 정확하다. 부모들은 동기들이 항상 평등하고 공평하게 대접받고 있다는 점을 확신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증언할 것이며, 그리고 침팬지들은 세 살 먹은 아이의 인지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결과들이 시사하는 바는 침팬지들이 공정성을 기대하며 이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에는 저항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보상물들이 불평등하게 건네진 경우와 사전 합의가 존중받지 못한 경우 둘 다에서 존재했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 침팬지들은 사회 계약에 관한 기본 신조들을 넘어서서 사회적 연대의 토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을 예증했다. 95번의 시험에서, 포도를 받았던 침팬지들은 자신들의 짝이 당근만을 받았을 때 가치가 높은 보상을 거부하는 확률이 두드러지게 더 높았다. 불평등으로부터 득을 본 침팬지들조차도 상황이 불공평하다고 인식했고, 그것이 다른 누군가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면 자신의 보상을 향유하기를 거부했다. 저자들이 서술하듯이,

 

뜻밖에도 우리는, 나머지 침팬지들도 가치가 높은 포도를 받았을 때보다 나머지 침팬지들이 가치가 낮은 당근을 받았을 때 침팬지들이 포도를 거부하는 확률이 더 높다는 점을 알아내었다. . . 이런 반응은, 침팬지들 사이에서든 꼬리감기원숭이들 사이에서든, 영장류에 있어서 불평등에 관한 이전 연구들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챔팬지들의 이런 단순한 행동을 인간 윤리의 복잡한 점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정말 사과와 오렌지(또는 아마도 더 적절하게, 당근과 포도)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였을 때 우리는 비우량 담보대출들을 최우량 등급의 채권으로 재판매하기 위해 금융 파생상품들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재포장하는 것은 불공정한 행위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금융 서비스 산업을 감독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위원회의 구성원들을 포함하여) 지금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동기가 우리보다 더 큰 파이 조각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불공평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이 공평하고 평등한지에  대한 일반적인 도덕 감각을 지니고서 삶을 시작했고 거기서부터 골조를 증축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침팬지들은 비슷한 도덕 감각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가 공평하다거나 또는 불공평하다고 판단하는 것의 복잡한 점들은 우리 종에 본질적으로 독특한 그 어떤 것보다 인간의 인지적 복잡성과 더 관련이 있는 듯 보일 것이다. 달리 말해서, 여기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다.

 

이것이 또한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속아 넘어갔다는 것이다. 세상의 앤드류 카네기 같은 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사회 계약의 예외적 존재라고 믿게 만들었다. 공정성과 평등은 작은 인간들에게는 좋을지도 모르지만, 산업의 주인들에게는 그런 진기한 관념들을 옆으로 치우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카네기는 진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서 틀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점에 관해서도 틀렸다. 우리가 금융 시장을 규제하는 쪽으로 움직일 때, 인간 사회에 대한 다윈의 이해를 고려하고 우리의 유인원 사촌들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협력과 공감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각자가 홀로 작업할 때보다 성공할 확률을 더 높이게 된다. 그런데 상황이 불공평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영속화하기를 거부해야 하는데, 비록 그것이 우리 자신들의 더 큰 몫의 파이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