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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래트코 베드럴: 오늘의 에세이-생명이 원하는 것

 

생명이 원하는 것

What life wants

 

죽은 물질은 자체의 목적이 없지만, 생명은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 그 점 때문에 생명은 물리학의 깊은 수수께끼가 된다.

 

―― 블래트코 베드럴(Vlatko Vedral)

 

 

과학들 사이의 분리가 허물어지고 있다. 자연은 분과학문적 경계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리고 우리의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우리는 과학의 전통적으로 분리된 이런 갈래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을 더 많이 본다. 그렇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점들이 계속 남아 있다.

 

물리학은 물질과 에너지의 기본 특성들과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다룬다. 화학은 원자들이 결합하여 더 복잡한 분자들을 만드는 방식과 이것이 그 결과로 생긴 물질들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묻는다. 둘 다 공유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생기 없는 물질을 탐구한다는 점이다.

 

반면에, 생물학은 살아있는 유기체들을 탐구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자연과학 전부를 하나의 큰 정합적인 전체로 여기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생기 없는 물질은 예외 없이 전적으로 자연의 법칙들을 따르는 듯 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생명체들은 나름의 의지를 지닌 듯 보인다. 그것들은 목적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의해 가장 잘 이해되며, 또한 가장 잘 규정될 것이다. 생명체들은 일을 행하려고 노력하며, 그리고 그것들이 자연의 법칙들을 위반할 수는 없지만, 생명체들은 확실히 자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그 법칙들을 활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물리학과 화학 사이의 연결들이 이 분야들 가운데 어느 하나와 생물학 사이의 연결들보다 훨씬 더 잘 확립되어야 하는 것은 거의 놀랍지 않다. 양자물리학의 법칙들(현재 우리의 가장 정확한 근본적인 자연 법칙들)이 화학의 법칙들도 전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과학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 물리학만 사용하여 어떤 복잡한 반응들의 모든 정교한 세부 사항들을 계산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럼에도 화학이 전체적으로 양자 이론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생물학은 상황이 다른 듯 보인다. 생물학의 어떤 부분들은 양자물리학으로 환원되기는 커녕 화학과도 분리된 듯 보인다.

 

진화론을 고려하자. 생식 능력을 갖춘 어떤 원시적인 생명체에서 시작된다고 가정하자. 그것의 자손은 어떤 비율의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들을 나타내고, 어떤 환경적 특징들 때문에 그런 돌연변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잘 된다. 함께 고려하면, 이런 조건들 때문에 우리는 훨씬 더 복잡한 유기체들이 출현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가장 단순한 유기체들이 여전히 지배적일 확률이 높지만 말이다). 다윈의 관념이 틀림없이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생명의 모든 복잡성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다. 우리는 종들이 유전자의 돌연변이들을 통해서 변화하며, 그리고 새로운 종들이 경쟁 종들보다 서식지에 더 적합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생존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적자생존의 '법칙'이 화학처럼 양자물리학의 기본 법칙들에서 비롯되는가?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나는 한 가지 것을 분명히 할 것이다. 나는 그저 살아있는 체계들이 자신들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양자물리학의 더 기묘한 측면들을 활용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대한 단순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것들은 그렇게 하는 듯 보인다. 양자 효과들 가운데 가장 기발한 것, 즉 양자 얽힘까지도 광합성을 하는 식물들이 가장 효율적인 경로로 자신들의 에너지 생산 부분들을 향해 빛 에너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한다고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비슷하게도, 어떤 새들은 이주하는 동안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하는 데 기묘한 양자 효과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양자물리학이 이런 살아있는 체계들에게 줄 수 있는 효율 이점은 그것 덕분에 그것들이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는 것, 즉 컴퓨터 과학자들이 병렬정보처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의 전 범위가 식물과 새 같은 거시적인, 따뜻하고 축축한, 시끄러운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것들이 행한다는 이런 암시들에 대한 놀라움과 흥분이 양자생물학으로 불리는 신흥 분야를 촉발했는데, 대중만큼이나 양자생물학에 사로잡힌 과학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생물학을 물리학에 환원시키는 것과 거의 아무 관계도 없다. 생명은 고전물리학과 중력도 활용하는데, 그것이 고전물리학과 중력이 생명 자체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명은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과 정합적일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물리학에 덧붙여 생명을 설명할 원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생명이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생명이 실제로 물리학의 법칙들과 정합적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생명은 물리학을 활용할 뿐 아니라 물리학의 영향도 받는다. 충분히 분명하게, 환경은 물리학을 통해 생명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자체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작용하는 두 영역―생기 있는 것들과 생기 없는 것들―의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구분 자체가 계속 유지되는지 여부이다. 문제는 생물학 이론의 기둥들 가운데 하나인 진화가 전적으로 물리학의 결과인지 여부이다. 특히, 진화가 원자와 분자들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양자물리학의 결과인가?

 

일견 이것은 있을 법하지 않는 일인 듯 보인다. 양자물리학의 조부인 닐스 보어라고 불리는 한 덴마크인은 '빛과 생명'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1932년 강연에서 훨씬 더 나아갔다. 그는 우리가, 심지어 원칙적으로도,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생체 안에서 생명을 조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어의 말에 따르면, '생명의 존재는 설명할 수 없는 기본적인 사실로 여겨야 한다'. 그럼에도 플랑크 상수―보어에 따르면, '고전역학적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부조리한 요소로 나타나는'―가 원자론의 환원불가능한 토대를 형성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생명도 생물학에서 해명할 수 없는 출발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보어의 견해는 두드러지게 비관주의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과학적 영역들의 통일에 대해 더 큰 희망을 품었다. 그들의 낙관적인 정신에 따르면, 여기에 탐구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시각이 있다. 양자물리학은 무작위성을 사용하여 단일한 원자와 분자들의 미시적 규모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거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이 통찰을 유전자의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라는 생물학적 관념과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생물학적 무작위'와 '양자 무작위'는 결국 매우 다를 것이지만 말이다.

 

하나의 명백한 구분은 자연선택이라는 진화 원리는 물리적 대응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생기 없는 물질의 상이한 상태들은 적응도(fitness)라는 매개변수에 따라 전혀 선택되지 않는다.

 

또는 그러한가? 생기 없는 물질의 상이한 평형 상태―즉,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안정한 상태―들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에 의해 미시적 관점에서 최초로 이해되었다. 1870년대에 볼츠만은 고립된 체계의 무질서의 정도가 항상 증가한다고 진술하는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물질이 나타내는 거시상태는 가장 많은 미시상태가 있는 것일 뿐이다. 두 개의 평범한 주사위를 굴린다고 상상하자. 여러분이 어떤 특수한 점수에 돈을 걸어야 한다면, 여러분은 칠을 택해야 하는데, 칠이라는 점수를 낳는 상이한 두 주사위 조합들은 여섯 개가 있고, 모든 다른 점수는 더 작은 수의 가능한 조합들이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는 입자들의 집합체들은 무질서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간단히 서술하면, 난잡해지는 방식들의 수가 정돈되는 방식들의 수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통찰을 어떻게 살아있는 체계들과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인가?

 

열역학 제2법칙의 경계 내에서 생명에 관해 정성적으로 말한 첫번째 사람도 볼츠만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기 있는 존재자들의 존재를 위한 일반적인 투쟁은 원료 물질들―유기체들에게 이것들은 모두 풍부하게 입수할 수 있는 공기, 물, 그리고 흙이다―위한 투쟁도 아니고, 열의 형태로 어느 육체에서나 풍부하게 존재하는 에너지를 위한 투쟁도 아니라, 뜨거운 태양에서 차가운 지구로의 에너지 전달을 통하여 입수할 수 있게 되는 [음의] 엔트로피를 위한 투쟁이다. 볼츠만에게 생명은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생기 없는 (죽은) 물질의 상태로부터 멀리 떨어져 머무려고 노력하고 있다. 생명은 환경으로부터 엔프로피가 낮은 재료를 흡입함으로써 이것을 행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은 자체의 무질서의 정도를 최대에서 멀리 떨어지게 밀어붙인다. 또 하나의 양자역학 선구자인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도 생명은 자유에너지, 즉 유용한 일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최대화하려고 노력한다는 관념을 장조했다. 이것은, 생명은 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머무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은,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때 있는 그대로 그냥 머무르고 유용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예를 들면, 돌과 다르다.

 

이것이 파악하기 어려운 적응도라는 매개변수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적자생존이라는 생물학적 원리를 재서술하는 방식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시도하자. 평형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를 더욱 더 빨리 획득할 수 있을수록 적응도가 더욱 더 높다. 사실상, 생물학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197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에 의해 예상되었다. 그는, 자연은 엔트로피 생산을 최대화하는 적응들, 즉 무질서를 가장 빠르게 생성하는 동역학을 선택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에 우호적인 몇 가지 이론적 논변들을 넘어서, 이것이 실제로 맞다는 실험적 증거는 거의 없다. 사실상 반대되는 증거가 있다. 이것은 정확한 방법으로 엔트로피 생산을 측정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그 원리에 틀린 것이 있다는 점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에서 생물학을 도출하려는 가장 최근의 시도는 이스라엘 물리학자 애디 프로스(Addy Pross)에서 비롯된다. 그는, 생기 없는 물질이 엔트로피를 최대화함으로써 열역학에 순응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생명체들은 그가 '운동 안정성(kinetic stability)'으로 부르는 것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엔트로피 생산을 극대화하는 것과 같지 않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모든 생기 없는 물질이 불가피하게 행하듯이, 수동적인 평형 상태에 이르는 대신에, 살아있는 체계들은 동역학적으로 안정한 상태를 획득하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일해야 한다. 동역학적으로 안정한 상태는 취약하고 끊임없는 재구성을 필요로 한다. 공중에서 한 곳에 단지 정지한 채로 머무르기 위해 날개짓을 하고 있는 새를 떠올리자. 이것은 철저한 균형잡기를 필요로 하며,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역동적일지라도 여전히 안정한 조건을 낳는다.

 

프로스가 옳다면, 진화생물학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화학으로 환원시키는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화학이 양자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우리가 생물학에서 양자물리학까지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대단한 성취일 것이다. 그렇지만, 여느 대단한 성취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의문들을 제기한다.

 

이 글은 생물 체계들과 무생물 체계들을 구분하는 것은 목적 감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생물학이 양자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고, 원자와 분자 같은 전형적인 양자 객체들이 아무 목적 감각도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 전환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운동 안정성의 상태를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물론, 이것은 우리를 다시 출발점으로 데려 간다. 한 간단한 출구는 목적성이란 환영일 뿐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프로스는, 목적성은 화학이 충분히 복잡해질 때 발생하는 창발적 특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목적성이라는 이 감각이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명을 규정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쉽게 제거하는 듯 보이는 결론들을 거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의문들 가운데 어느 것에 대해서도 해답을 지니고 있는 척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연과학들 사이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분야들의 진보 속도 덕분에 나는 조만간에 우리가 얼마간의 진전을 이룰 것이라는 점에 낙관적으로 되었다. 당분간 우리는 그냥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다. 생명체들로서 우리에게 그것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