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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츨리: 인터뷰-신앙 없는 자들의 신앙

 

 

유토피아에 관한 무신론적인 종교적 사상가 사이먼 크리츨리(Simon Critchley)와 신앙의 허구

 

―― 베아트리스 마로비치(Beatrice Marovich)

 

저는 책 제목에 "신앙 없는"이라는 술어를 사용하기로 한 선택에 관해 궁금합니다. "신앙 없는"이라는 꼬리표는 대체로 시적 효과를 위해 붙인 것입니까? 요컨대, 이 책은 신앙에 관한 것, 즉 어떤 종류의 신앙 또는 신앙을 바라보는 어떤 종류의 방식을 개발하기, 또는 신앙을 이해하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책은 무신론에 관한 책이 전혀 아닙니다.

 

맞습니다. 요컨대, 이 책은 신앙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신론적 신앙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 같은 그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자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않는 신앙입니다. 그것은 자체의 선언을 통해서 존재하는 신앙입니다. 앞서 출판된 제 책 <<무한하게 요구하기(Infinitely Demanding)>>은 다음 질문에 집중합니다. 우리의 윤리적 삶과 정치적 삶에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동기 부족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대충 서술하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전적 저자들을 살펴볼 때, 신앙의 문제로 다시 데려갑니다. 윤리적 정향을 뒷받침하는 어떤 신념 또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이 책에서 제가 비판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제가 "복음주의적 무신론"(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무한히 둔감하다고 알아차릴 뿐입니다. 그리고 상당히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뉴욕 타임즈>>를 위해 일하면서 제가 발견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특히 도킨스가 정말로 얼마나 많은 매력을 지니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그의 작업은 또 하나의 진보주의적, 유사신학적 서사일 뿐입니다. 그것은 신의 계획의 전개가 아니라 진화적 형식의 설계의 전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기양양한 무신론자가 아니며, 그리고 결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종교를 거부하는 것, 또는 종교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제 입장에서 바라보면, 제고할 가치가 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제가 가장 읽기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종교적 저자들입니다. 파스칼, 아우구스투스, 바울. 때때로 저는 그들이 전개하는 움직임에 미혹당합니다. 그러나 종교 없는 철학은 제게 제고할 가치가 없는 생각입니다. 당신이 신의 존재를 믿는지 아니면 믿지 않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저와 크게 무관합니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고 서술할 수 있는 종교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에 대한 어떤 믿음으로 마무리될 필요가 있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것이 그 상황과 관련하여 정말 중요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당신의 종교 이론에 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종교란 무엇입니까?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종교를 라틴어 렐리가레(religare), 즉 함께 묶기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함께 묶기로서의 종교는 연합체를 결성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제게는, 가장 강하게 표명되었을 때 종교는 집합성, 공통성의 가능한 형식들을 구성하는 듯 보입니다. 종교는 우리에게 연합체에 관해 많을 것을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매혹시키는 연합체의 종교적 힘과 관련된 것이 있습니다. 지난 가을에 저는 주코티 파크에 많이 내려가 있었습니다. 제가 했어야 될 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것은 연합체였습니다. 친절, 그리고 품위, 그리고 그런 종류들의 "저차원의" 미덕들을 바탕으로 연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명백히 종교적인 사람들도 다양한 정도로 그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을 종교적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까?

 

제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은 음... 제가 이것을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요?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은 이해관계가 매우 다른 사람들의 조립체였습니다. 종교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유방임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강경좌파들도 있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일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앙 없는 자들의 협의체였습니다. [웃음] 또는 주류 사회에 의해 주변화되었다고 느꼈고 이 공간에서 서로 발견했었던 사람들의 협의체였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일까요? 글쎄요, 제게는, 그것과 관련하여 종교적인 것은(말하면 이상한 듯 들릴지도 모르지만) 채택된 전술들이 압도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협력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한 하나의 시각으로서의 무정부주의는 인간들이―국가, 법, 경찰, 그리고 관료의 개입 없이―이기심에 바탕을 두지 않는 방식으로 합의에 따라 협력할 수 있다는 신앙이 있다는 의미에서 종교적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수평적인 회중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종교적 견해들을 지녀야 했었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 자체, 즉 어떤 장소에 결집한다는 것이 일종이 회중입니다. 그것은 약간 기발하게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글쎄요, 그것은 하나의 종교 이론처럼 들립니다. [웃음]

 

그것은 종교 이론입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종교 이론은 공동체 이론입니다. 이 책에서 성 바울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데, 저는 바울을 언제든 어떤 특수한 시기에 공인된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의 우상들을 항상 파괴하고 있는 본질적인 개혁가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근에 바울에 관해 저술했던 철학가들이 몇 사람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알랭 바디우가 있습니다. 어떤 신앙, 심지어 신앙 없는 신앙의 형태가 성 바울 같은 기독교 인물의 저작과 관념들에 기반을 두고 모형화될 정도로...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일종의 우선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또는 기독교적 전통?

 

좋은 질문입니다. 저는 정말 그 답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만족할 만하게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말하자면, 이슬람교에 관해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유대교에는 제가 기독교를 이해하는 방식에 매우 가깝게 만들, 매우 비슷한 요소들 또는 유대교를 해석하는 방식들이 있다고 말할 만큼 저는 유대교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의 터무니없음이 항상 저를 매혹시켰다고 말할 것입니다. 화신이라는 관념, 그리고 죄를 지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살의 외피를 두른 가장 강력한 자(즉, 신)라는 관념. 종교를 위한 전제로서 그것은 항상 매우 있을 법하지 않는 것 같았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매우 있을 법하지 않기 때문에 매력적입니다. 바울에게서 얻는 십자가의 어리석음. 저는 그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깨닫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의 무능함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것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일까요? 저는 우선 맥락에 관해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서양"이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또는 그냥 미합중국이라고 말합시다―자체를 압도적으로 기독교적이라고 여기며, 그리고 매우 흔히 기독교가 훼손당하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의 명령은 바로 기독교의 특이성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정말로 나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의 무능함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은 가난의 외피를 두른 신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래서 만연하는 자본 축적을 믿는 것은 그야말로 기독교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코넬 웨스트(Cornel West)는 당신을 "세속적 철학자"로 서술했습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정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특별히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우 강한 종교 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이것이 저를 종교적 사상가, 또는 종교적 사상가들로부터 배운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세속적/비세속적 쟁점은 핵심을 놓칠 뿐입니다. 종교와 관련하여 진행되고 있는 것의 지속성과 미묘성을 이해하기를 거부할 뿐인 독단적 세속주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심받을 때 매우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의 신앙을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세속주의자에게 근본적인 것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면, 그는 흔히 얼굴이 붉어질 것이고 탁자를 치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당신은 일종의 유사종교적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말할 것은 종교가, 자체의 놀라운 다양성으로, 버려지지 말아야 하며, 미래에 상이한 행동 형태들을 구성하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탐구될 필요가 있는 가능성들의 기록보관소를 구성한다는 점입니다. 근대 세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관해 생각하는 한 가지 방식인,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어떤 본원적인 단절, 또는 믿음과 불신의 시기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학적 개념들이 근대 정치에서 새로운 형식들, 새로운 표현 형식들을 찾아내었다는 것이 훨씬 더 맞습니다. 미합중국의 헌법은 신에 대한 호소에 의해 보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합중국의 헌법은 신학적 취급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근대적 형식들의 정치가 더 이상 신학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개념들의 일종의 변형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왕이 신의 대표자였던 시기―에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학적 장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전이시켰습니다. 신성한 왕신성한 인민이 되었습니다. 신학은 정치 속에서 계속 살고 있습니다. 지적인 과업은 역사 수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학자의 훈육은 정치에 관한 논의들이 망각하려고 노력하는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훨씬 더 강하게 요구하며 종교가 그저 기록보관소가 아니라, 당신이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는 우리가 그것을 넘어섰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우리는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가, 과거의 나쁜 독단주의자들처럼, 자신들이 독단주의자들이 아니라고 믿기 위해 미친 듯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독단주의자들이며, 세속적인 것에 관해 독단주의자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적으로 밝혀서 폭로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상이한 세계관들은 서로 다른 다양한 종교적 세계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경험이 있으며, 그런 다양한 형태들 가운데 하나가 자체가 비종교적이라고 믿는 세속적 자유주의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어떤 것에 밀고 들어가면 그것의 독단주의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저는 유토피아, 그리고 허구에 관해 묻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책에서 이것들 각각―유토피아라는 개념,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정치적 동기부여의 기능을 수행하는 최고의 허구라는 개념―에 관해 많이 말합니다. 그것들 사이의 관계는 무엇입닉까?

 

기본적으로, <<신앙 없는 자들의 신앙>>의 제1부에서 제가 제시하는 주장은 정치적 세계가 허구들의 세계라는 것인데, 저는 이것을 완전히 논란의 여지가 없는 주장으로 여깁니다. 정치의 영역은 허구들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허구들을 그것들의 역사를 검토하고 그런 허구들에 관한 일종의 인류학을 수행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허구들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요구입니다. 그 다음에 제가 제기하는 의문을 이렇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존재할 것인가? 그것이 월리스 스티븐슨에서 차용하여 제가 "최고의 허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의 착상은 최고의 예술 작품은 최고의 허구―우리가 허구라고 알고 있지만(모든 예술 작품들은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믿는 허구―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정치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루소에 관한 장의 말미에서 저는, 정말로 시적인 견지에서 정치를 시도하고 생각하도록, 최고의 허구라는 이 관념을 퍼뜨립니다. 그리고 최고의 허구는 일종의 유토피아, 즉 우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여태까지 인식되었던 적이 없는 것의 입장에서 존재하는 것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라는 전제일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하기 어렵게 들린다는 점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시하는 최고의 허구의 사례는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관념을 도입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는 하나의 산업노동자 계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기 저작에서 마르크스가 행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정치적 주체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혁명적 변화를 위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새롭게 출현하는 것에서 실제로 그것은 일단의 유권자들로서만 존재합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등장해야 했으며, 그리고 그것이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공산주의자들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공산당 선언>>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최고의 허구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을 고려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른바, 어떤 선언을 통해서, 어떤 신앙 행위를 통해서 그것을 억지로 생겨나게 합니다.

 

그래서 그런 정도로, 정치는 최고의 허구들의 전개에 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는... 글쎄요, 그 책에는 와일드로부터 인용한 또 하나의 구절이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포함하지 않는 그 어떤 세계 지도도 쓸모가 없는데, 그것은 인류가 계속 도착하는 나라를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와 비슷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정치적으로 동원될 수 있고 표명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도로, 어떤 정치든지 정치가 그저 현실정치, 또는 냉소주의, 또는 실용주의로 되지 않으려면 그것은 유토피아적 차원에 얼마간 호소해야 합니다.

 

물론 프로이트는 종교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종교는 환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과학적 세계에서 이 환영에 대한 종말의 미래를 봅니다. 그에게 이것은 종교에 대한 일종의 유죄 판결입니다. 당신도 종교를 허구적인 것으로 여기는 듯 합니다. 종교와 허구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글쎄요, 종교들은 허구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허구들. 최고의 허구들. 세계의 종말, 최후의 심판, 최종 어휘, 전부라는 허구들. 그래서, 저에게 허구는 객관적 사실을 붙잡기 위해 버려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허구는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무언가 다른 것을 행하기 위해 정치적 경험의 허구성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지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허구와 유토피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유토피아주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의 입장에서 세계의 상황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급진적으로 재조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게는, 우리가 그런 유토피아적 차원을 상실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대로의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롬니가 될 것인지, 또는 오바마가 될 것인지, 또는 기타 무엇이 될 것인지 관해 추측합시다. 그리고 그것은 우울합니다. [웃음] 그것은 당신이 유토피아의 구체적 존재를 실제로 믿고 있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의 일종의 사고실험입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생성하는 틀, 또는 기호, 또는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어떤 예술은 유토피아적입니다. 그래서 제게 유토피아는 그것과 비슷합니다.

 

사랑은 허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허구입니다. 그것은 가장 특별한 허구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완전한 허구, 즉 가장 쉬운 방식으로 산산조각날 수 있으며, 그리고 작업과 행위 등을 넘어서는 어떤 경험적 증거도 없는 환영에 두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사랑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은 매우 있을 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계속해서 허구를 쓸 것입니까?

 

그것은 신념입니다. 당신이 결심했던 허구와 계속 함께 하려는 신앙, 충성이 당신의 최고의 허구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랑에 관해 혼동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계약이 아닙니다. 사랑은 호의의 교환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사랑은 "너는 이것을 하고 나는 저것을 할 것이다"가 아닙니다. 그 책에서 제가 사용하는 두 가지 표현은 얼마간 뒤섞인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주는 것이고, 자신이 그것에 대한 힘이 없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당신이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당신이 주고 있는 것은 정의상 당신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뭔가를 되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혼인 전 계약과 마찬가지로 계약으로 보증된 관계가 아닙니다. 또는 결혼 전 계약이 나타날 수도 있는 방식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훨씬 더 본원적인 것을 향해 스스로를 정향하는 것입니다.

 

코넬 웨스트가 제게 상기시켜 준 조지 산타야나의 소중한 구절이 있습니다. 종교는 무능함을 의식한 상태에서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능함에 대한 의식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당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에 당신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때 당신이 지니고 있는 힘은 그 힘에 대한 묵종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기묘한 사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학이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입니다. 특히 기독교에서, 그렇지만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런 의문들과 씨름했던 사람들의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허구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비해 무엇이 실재적입니까? 무엇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허구적입니까? 구체적? 포장 도로?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사랑은 확실히 허구이지만, 사랑은 최고의 허구일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이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허구라고 알고 있는 최고의 허구일 것입니다. 어떤 다른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존재를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랑에 대한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