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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드리퍼스: 오늘의 인용-현대 서양의 허무주의

 

"단테의 세계의 고정된 확실성에서 우리 자신의 세계의 실존적 불확실성으로 어떻게 도달했는가? 그 이야기는 길고 복잡하며, 이 책은 그 이야기의 뼈대를 표명하는 데 전념한다. 그런데 서양의 초기 근대 시대로 알려진 것에서, 십칠 세기 초에 일어났던, 주요한 전환점들 가운데 하나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게 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1600년 경에 중세 세계는 붕괴되고 있었다. 특히 신의 의지가 우주를 조직한다는 점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당시에 이런 전개를 명시적으로 인식했던 사람들은 간혹 있었더라도 아주 적었다. 전체 문화가 당연히 여기는 실천들은 식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당대의 문학과 철학 전체에 걸쳐 이런 역사적 전개에 대한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셰익스피어 자신은 신성한 질서의 붕괴에 거의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가 그것을 알았든 몰랐든 간에, 이런 전개는 그의 많은 극작들에 동기를 부여한다. 위대하고 민감한 예술가로서 셰익스피어는 신성한 질서의 붕괴가 당대의 세계사적 쟁점들 가운데 하나임을 직관적으로 감지했던 것 같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많은 배역들은 이런 저런 식으로 이런 근대적 전개에 직면한다. 예를 들어, 맥베스를 생각하자.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터무니없이 큰 야망"만으로 신성한 질서에 있어서 자신의 자연적인 지위를 넘어 새롭고 더 높은 왕으로서의 지위로 도약하고 싶어하는 한 개인을 발견한다. 자신의 의지와 욕망으로 우주의 신성한 질서를 변환시켜야 한다는 바로 그 생각이 중세 시대의 세계에 속한 단테에게는 금기였을 것이다. 사실상, 단테가 대체로 이런 종류의 자기주도적인 야망과 관련시키는 인물은 사탄 자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인데, 사탄은 신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로 대체하려고 시도하고, 그 시도 때문에 지옥의 바닥으로 추방당한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야망을 비난하기는 커녕 그것이 상이한 방향들로 우리의 직관을 끌어당기는 방식에 매혹된 듯 보인다. 한편으로, 맥베스는 어떤 점에서 공감이 가는 인물이다.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그의 야망은 이해할 만한 듯 보이는데,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그의 특수한 전략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사실상, 맥베스는 실제로 공감이 가는 인물일 뿐 아니라, 그 연극의 바로 그 성공이 우리가 그가 그렇다고 깨닫는 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 연극의 주인공이 성공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그 연극의 비극은 우리의 마음을 장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대가를 치루어야 할 순전히 사악한 인물에게는 비극이란 없다. 그렇지만 어떤 점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더라도 맥베스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좋든 나쁘든, 신성한 질서는 자기주도적인 야망의 등장에 끈질지게 저항하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이런 삶의 방식을 아직 뒷받침하지 않을지라도 셰익스피어는 이런 야망을 잠재적으로 찬양할 만한 특질로 여길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성한 질서는 자기주도적인 야망의 등장에 끈질지게 저항하고 있는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트로이러스와 크레시더(Troilus and Cressida)>> 같은 다른 연극들에서 신성한 질서의 붕괴는 기껏해야 희극적인 것으로, 그리고 매우 가능성이 높게 명백히 나쁜 것으로 제시된다. 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는 신성한 계획에 기반을 둔 삶의 방식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것에 관해 정확히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는 알아낼 수 없는 듯 보인다.

 

또는 햄릿의 경우를 생각하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 3막 1장의 유명한 독백은 햄릿이 살기를 선택해야 하는지 또는 죽기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쟁점을 나타낸다. 그가 이것을 자신에게 개방된 하나의 선택으로 이해한다는 바로 그 생각이 그의 문화가 신이 우리의 현존에 관한 이런 근본적인 사실들을 결정한다는 점을 더 이상 당연히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물론 이것이 햄릿 이전에는 아무도 자살을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문화적 해석은 햄릿의 경우에 중세 시대의 인물의 경우와 본원적으로 다르다. 중세적 전통에서 자살은 신에 대한 반역 행위, 즉 올바르게도 그의 것인 결정권을 신으로부터 탈취하려고 하는 시도로 이해된다. (사실상, 단테는 자살을 지옥의 아홉 개 원 가운데 일곱번째 원에 배치하는데, 그것은 신에 대한 모독자들 바로 옆에 놓여 있다.) 또 다시 우리는, 사탄이 주님에 맞서 천사들의 반란을 조직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가 연루된 같은 종류의 반역 행위를 발견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햄릿의 경우에는 자살이 신에 대한 모독 행위일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인다. 문제는 그야말로 "어느 것이 정신적으로 더 고귀한가.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그냥 참고 맞는 건가 / 아니면 무기를 들고 고난의 바다에 맞서 / 싸우다가 끝장을 보는 것인가?"이다. 달리 말해서 문제는, 그것이 신에 대한 모독이고, 그러므로 명백히 잘못된 행위인지 여부가 아니다. 문제는 고통을 겪는 것이 더 나은 결정―정신적으로 더 고귀한―인지 자살을 감행하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인지 여부이다. 신 또는 우주의 신성한 계획자로서의 신에 대한 이해는 햄릿이 이 문제를 숙고할 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 달리 말해서, 중세 시대의 신성한 질서의 붕괴는 진정한 실존적 질문을 제기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개방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무거운 부담을 동반한다. 우리를 정초하는 신의 신성한 계획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자신의 실존적 선택을 내려야 하는가? 근본적인 기반에 대한 욕망, 자신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는 근거에 대한 어떤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대한 욕망은 철학적 전통에서 가장 명료하게 볼 수 있다.

 

근대 철학의 역사에서 확실히 가장 중요한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는 잉글랜드에서 셰익스피어가 글을 쓴 지 대략 한 세대 후에 프랑스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데카르트의 가장 중요한 저작들은 1630년 경에 저술되었다.) 그의 주요한 철학적 기획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확실히, 그리고 결코 아무 의심도 없이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입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예를 들면, <<매트릭스(The Matrix)>>라는 영화에서 등장 인물들은 우리의 삶과 꼭 마찬가지의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 모두가 겪는 것과 매우 비슷한 종류들의 경험을 겪고 있지만, 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겪고 있는 듯 보이는 그런 종류의 세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세계가 나타나는 대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매우 기본적인 관념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헐리우드보다 350년 전에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아무 의심도 없이 알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도대체 의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라는 생각과, 그리고 우리가 이런 종류의 근본적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훨씬 더 극단적인 생각은 이런 종류들의 질문들이 진정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을 생각이다. 데카르트적 기획 자체가 중세 시대에는 오만한 행위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우리를 속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우리 자신에게 입증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럼에도 우리가 신이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가정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가정은 신이 애초에 신성하고 인자한 우주 제작자로 이해되는 세계에서는 도대체 이치에 맞지 않는다. 데카르트가 회의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진지하게 고려될 수 있었다―사실상 철학적 사유의 한 패러다임으로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1600년대 초에 그가 글을 쓰고 있을 때 중세적 가정들은 더 이상 당연히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리고 도대체 외부 세계가 존재하는지 여부와 같이 매우 기본적인 것이 철학적으로 정초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관한 우리의 실존적인 선택들은 틀림없이 얼마나 더 적게 정초되어 있겠는가?

 

십구 세기 말의 위대한 독일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이것으로 의미했던 바는 현대 서양에서 우리는 실존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우리를 위해 이미 제시되어 있는 문화에서 더 이상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중세 시대의 신은 실존적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기 전에 대답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런 역할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현대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지적하듯이, 이것은 현대의 종교 신자들과 회의주의자들 모두에게 마찬가지로 참이다. 몇몇 사람들이 주장한 대로 현대 미합중국에서 제3차 종교 대각성 운동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입수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종교적 신앙은 실존적 물음을 억누르기에 충분하지 않다. 비신자들은 인간적인 것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는 점은 더 이상 당연히 여겨지지 않는다.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는 그러했는데, 비신자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사악한 것이었고, 인간적으로 성취할 가치가 있는 모든 기쁨에 맞서게 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런 배타적인 신앙을 어떻게든 유지하는 광신적인 종교적 하부문화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 신자들의 신에 대한 믿음이, 현대 서양에서 대체로 그렇듯이, 믿지 않음에도 찬양할 만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양립하는 한, 종교적 신앙은 그것 자체로 실존적 물음을 차단할 수 없다. 비신자가 그 자체로 형편없지는 않다는 생각은 비신앙이 신자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선택 사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서양에서 우리가 세속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 신자들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실존적인 물음들에 직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존적 물음들에 직면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답할 자원이 있다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다. 현대 서양에서 그런 자원을 소유하는 종교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테일러의 최근 작업은 이런 전제에서 시작한다. 사실상 테일러는 종교와 영성의 급진적인 번성―종교적 삶의 진정한 폭발―을 현대 시대의 중요한 특징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어떤 대답을 다른 어떤 대답보다도 선호할 이유가 없다는 관념을 허무주의라고 부르며, 그리고 니체는 이것이 신의 죽음 이후에 우리의 현재 조건에 대한 더 나은 서술이라고 생각했다.

 

허무주의 덕분에 우리가 선택하는 어떤 삶도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에 니체는 허무주의가 큰 기쁨이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대신에 그것이 소름끼치는 것임을 깨닫는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서술하듯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우리의 견해는, 허무주의는 어느 모로 보나 광신만큼 닫힌 사고방식이고, 둘 다 살 만한 삶을 정초하기에 충분한 기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현대 시대에 유대-기독교 일신론이 문화적으로 충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 테일러보다 더 회의적이다.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서양의 역사에는 자신을 넘어서는 것으로 경험되는 무언가에 의해 인도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다른 종교적 전통들이 존재한다. 3장은 하나의 그런 전통, 즉 호머에 의해 생생하게 묘사되는 대로의 그리스적 다신교의 전통을 고려한다. 그렇지만 그것에 전념하기 전에 현대 시대의 슬픔과 상실감에 대한 가장 예민한 최신의 설명을 살펴볼 것이다."

―― 허버트 드리퍼스(Hubert Dreyfus), 션 도런스 켈리(Sean Dorrance Kelly), <<빛나는 모든 것들(All Things Shining)>>(Free Press, 2011), pp. 1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