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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칠리: 필립 K. 딕, 과학소설 철학자, 3부-꿈 공장에서의 모험

 

- 아래 글은 현재 뉴욕 뉴스쿨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사이먼 크리칠리(Simon Critchley)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소설가로 알려진 필립 K. 딕(Philip K. Dick, 1928-1982)의 철학자적 측면에 관해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에세이 중 3부를 옮긴 것이다. 1부와 2부는 각각 여기여기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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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꿈 공장에서의 모험

  

이전의 포스트 글에서 우리는 초기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필립 K. 딕의 지적 유대와 철학적 유대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최소한 문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거울 속의 그 영지주의자를 살펴볼 때이다. 계속 읽어주세요.

 

필립 K. 딕의 명백히 독특하지만 열정적으로 고수된 세계관과 그것이 구현하는 영지주의는 몇몇 사람들이 1960년대 이후 과학소설에서 디스토피아적 전환이라고 부르는 것 이상을 설명하며, 또한 거의 틀림없이 우리 시대에, 문자적이든, 예술적이든 또는 영화적이든, 허구에 관한 지배적인 이해 양식이 된 것을 제공한다. 이것은, 현실은 치명적인 환영, 즉 상황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찢어야 할 필요가 있는, 꿈 공장에서 생성되는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매트릭스라는 관념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말하자면, 환영의 장막을 찢고 진리를 바라봤다는 관념에 몰두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즐겁다. "나는 선택받은 자들에 속하고, 알고 있는, 영지 속에 있는 소수들에 속한다."

 

또한 딕의 영지주의 덕분에 우리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실존적으로 가장 고된 가르침―죄는 원죄의 형식으로 우리 안에 있다―을 새로운 견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일단 영지주의를 수용하면, 사악함의 원천은 인간의 마음 속이 아니라, 기업자본주의의 부패한 아르콘들이든 누구든 그들과 함께 저쪽에 있다. 우리는 사악하지 않다. 사악한 것은  세계이다. 이것은, 타고난 인간의 선함과 어린 시절의 순결이라는 관념에 의존하는 여러 하인츠의 낭만주의들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루소에게서 최초로 그것의 근대적 목소리가 발견되는 통찰이다. 성인의 삶은 대단한 재앙인 듯 보이기 때문에 우리 성인들은 어린 시절을 이상화한다. 우리는 어린이라는 것―무력한 존재라는것―이 흔히 그것 자체로 재앙이라는 점을 망각한다.

 

영지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일단 사악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뒤로 물러나서 우리의 본질적인 선함,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불꽃, 우리의 순수성, 우리의 진정성을 회복할 수 있다. 뉴에이지 몽매주의의 비열한 산업 전체와 그것의 다양한 영적 및 물질적 "해독" 기법들, 그것의 유사컬트적,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비밀 강조를 추동하는 것은 바로 순수성과 진정성에 대한 이런 욕망이다. 이런 유독한 세계관에 맞서 나는 우리가 대단히 불순하고 진정성이 없는 생물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내부에 어떤 불꽃이 있든 간에 그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다.

 

"매트릭스" 삼부작과 딕의 소설의 직접적인 영화 각색본들 외에도, 덴마크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라스 본 트리에(Lars von Trier)의 가장 최근의 두 편의 영화에는 강한 영지주의적 주제들이 있다. 이 글의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은 간단한 몇 줄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안티크리스트(Antichrist)"(2009)에서 샬롯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가 연기한 배역은 이렇게 말한다. "자연은 사탄의 교회다." 다른 한편으로, "멜랑콜리아(Melancholia)"(2011)에서 키르스텐 던스트(Kirsten Dunst) 배역은 샬롯 갱스부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지상에서의 삶은 사악하다는 것이다." 폰 트리에에서 영지주의적이지 않는 것은, 삶이 사악하다면 어디에도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가 주장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지구와 멜랑콜리아라는 불량 행성의 충돌을 환영해야 한다.

 

영지주의적 진정성 이데올로기의 더 순수한 판본은 미국에서 전대미문의 가장 큰 흥행 수익을 올린 영화인 제임스 캐머런(James Cameron)의 2009년 서사시 "아바타(Avatar)"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54년에 지구의 자원은 다 소진되었고 자연은 더러운 유독한 빈 껍데기로 바뀌었다. 부패하고 전권을 가진 RDA 코퍼레이션은 판도라 행성에서 적절하게 명명된 언옵테이니움(Unobtainium, 얻을 수 없는 물질)을 채굴하고 있다. 이 행성은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이와(Eywa)라는 모신을 숭배하는 나비족―피부색이 파랗고, 아름다우며, 키가 10피트인 존재자들―의 고향이다. 하반신이 불구인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Jake)는 결국 외계인 나비족 아바타가 되고, 그의 참된 연인 네이티리(Naytiri)와 결합하며, 사악한 기업의 극악무도한 인간 세력을 패배시킨 후에 자연과 하나가 된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외계인이 되며, 지구라는 끔찍한 고향을 떠나 외계의 신성한 땅을 향한다. 핵심은, 자연과의 진정한 조화는 세속적 성질의 의복을 벗어버리고 외계인이 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딕의 영지주의 덕분에 편집증적인 양식의 미국 정치―그리고 미국 정치만이 아닐 것이다―를 다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딕은 워터게이트라는 주제로 그리고 닉슨 대통령의 하야는 동굴의 그릇된 우상들을 넘어서는 참된 신의 재확인이라는 약간 기묘한 관념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말하자면, 현상계는 부패하고 비밀스러우며 사악한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는 감옥이다. 이런 견해에 대한 정치적 유사물들이 너무 많아서 여기서 나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인터넷의 방대한 리좀적 번성과 병행해온 음모 이론들의 끊임없는 등장에 관해 생각하자. 미국은 비밀스러운 전능한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널린 퍼진 관념―우파와 좌파에서―에 관해 생각하자. 이들은 아이비리그 출신의 WASP들 또는 프리메이슨 회원들 또는 유대인들로 식별되곤 했는데, 이제는 일반적으로 골드만 삭스의 전직 고위 간부들로 식별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알려질 수 있는 비밀이 있고 그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비밀 소집단의 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본질적으로 영지주의적인 사유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는 불순한 진정하지 않은 세력에 대한 순수성의 옹호가 되고, 참된 지도자는 거의 초인간적인 해결책으로 악의 세력과 싸울 수 있는 진정한 영웅이어야 한다. 미트 롬니(Mitt Romney), 이쪽으로 오세요.

 

또한 영지주의의 도덕은 기묘하게도 우리의 현 상황과 관련이 있다. 한스 요나스가 강조하듯이, 영지의 소지자들은 인류의 더럽혀진 거대한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살아간다. 또한 세계에 대한 증오는 세속적인 도덕에 대한 경멸이고, 그래서 이것은 두 개의 동등하지만 반대되는 윤리적 반응―금욕주의와 방종주의―을 초래한다.

 

금욕주의자는 영지에 접속함으로써 세계는 가능한 한 거의 접촉하지 말아야 하는 오염된 유독한 기계라고 추론한다. 거의 틀림없이 이것은, 내면의 신성한 불꽃을 발견하고 지키기 위해서 환경적 접촉과 영양적 접촉, 성적 접촉에 맞서 육체와 영혼을 정화하는 것을 역설하는 현대의 전체 문화 및 "해독" 컬트와 일관성이 있다. 현대 금욕주의의 놀라운 진실은 다른 한 영화, 토드 헤인즈(Todd Haynes)의 뛰어난 영화 "세이프(Safe)"(1995)에서 강력하게 연출되는데, 그 영화에서 줄리안 무어(Julianne Moore)가 연기하는 배역은 생명에 대한 전면적인 과민 반응을 나타낸다. "환경성 질환"이라고 지칭하는 것 때문에 그는 결국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자조 컬트에 빠지게 되어 거울 속 자신의 영상에 "나는 자신을 사랑한다"라는 말과 다른 주문들을 중얼중얼 읊조리면서 저자극성 꼬투리 안에서 홀로 살아간다.

 

금욕주의자의 이면은 방종주의자인데, 방종주의자에게는 자신의 영지에 대한 접속이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보호 둘 다를 의미한다. "그대가 뜻하는 바를 행하라!"는 알레이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의 신비주의적 협잡에 관해 생각하자. 또한 의도적으로 술에 취하거나 다가오는 차량들에 뛰어들어 돌아다니는 엄청나게 부유한 금융인에 관한 뉴욕의 도시 신화―나는 흔히 늦은 밤에 셀 수 없이 많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에 관해 생각하자. 그는 자신이 위해로부터 안전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운명은 자신의 편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는 자유롭게 자신이 "뜻하는" 바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여러분이 일단 비밀에 접속하게 되면 우주의 힘들은 여러분의 욕망에 동조한다.

 

유독하고 소외시키는 세계에 직면했을 때는 과민 반응에 안전한 거리로 물러서거나 아니면 인류의 바이러스적 소용돌이 속으로 저돌적으로 뛰어들 수 있다. 어떤 식이든, 나는 내가 괜찮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명백히 미친 듯 들리겠지만, 나는 딕의 영지주의가 우리의 후기 근대 시대의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불안에 대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결정론적 과학적 세계관의 억제할 수 없는 등장은 문학, 문화, 역사, 종교 등과 연관되는 모든 인간 활동 영역들을 침범하여 압도할 조짐을 보인다.

 

스스로에게 묻자. 모든 것을 소진하는 일원론적 자연주의에 직면했을 때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저명한, 흔히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이 저술한, 밝게 채색된 양장본으로 판매되는 뇌 또는 우주에 대한 탐구서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경이와 의미의 파편들을 무엇이든 입수할 것이라고 바라면서 그 견해를 수용할 수 있다. 또는 어떤 판본의 이원론으로 복귀함으로써 과학적 결정론을 거부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이든 설탕이 발린 영적 또는 종교적 형이상학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또는 이른바 카프카나 베케트의 좌절당한 모더니즘에 대한 향수를 여전히 품고 있다면 가치 혼란의 무정한 세계 속의 고독한 소외된 자기로 복귀함으로써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길, 즉 전적으로 자연주의적이지도 않고 종교적이지도 않고 모더니즘적 비참주의(miserabilism)의 어떤 재현도 아닌 길이 열려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한스 요나스을 인용하면, "철학이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기회에 논의할 다른 이야기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