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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칠리: 필립 K. 딕, 과학소설 철학자, 2부-미래 영지주의자

 

- 아래 글은 현재 뉴욕 뉴스쿨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사이먼 크리칠리(Simon Critchley)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소설가로 알려진 필립 K. 딕(Philip K. Dick, 1928-1982)의 철학자적 측면에 관해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에세이 중 2부를 옮긴 것이다. 1부는 여기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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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미래 영지주의자

 

이전의 포스트 글에서는 필립 K. 딕의 생애와 저작에 대한 1974년 2월과 3월의 사건들(2-3-74로도 알려진)의 영향과 가능한 철학적 의미를 살펴보았는데, 그때는 1회 복용량의 펜토탈나트륨, 빛나는 물고기 장식, 그리고 수십년 동안의 소설 쓰기와 유사철학적 활동이 8,000쪽에 이르는 딕의 "주해"를 낳은 계시 속에서 결합되었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딕이 2-3-74의 현란한 환영들을 경험하는 동안 직관했다고 주장하는 진정한 실재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무형의 외침과 광란으로 펼쳐지는가 아니면 그것은 어떤 사유 또는 믿음의 전통을 시사하는가? 나는 후자라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서 사물들은 이미 기묘한 우주 속에서 명백히 약간 더 기묘해지는데, 그래서 꽉 붙잡자.

 

"주해"의 바로 그 최초의 행들에서 딕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로고스(Logos)가 수많은 살아있는 존재자들에 대해 고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로고스는 "주해"의 본문에 산재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닌 낱말인데,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사실상 "말"이다. 또한 그것은 언술, 이성[라틴어로 라티오(ratio)] 또는 무언가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 딕이 자주 언급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우에 로고스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나른하게도 무지한 질서정연한 우주(코스모스)를 지배하는 보편 법칙이다. 확실히 딕은 이 마지막 의미를 염두에 두지만―가장 중요하게도―로고스는 요한복음의 첫번째 절을 가리킨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그리스도라는 인격 속에서 살이 된다.

 

그런데 딕의 환영의 핵심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전적으로 기독교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영지주의적이다. 그것은 신비주의적 지성인데, 그것이 가장 고양된 순간에는 로고스와 동일시되고 빛살의 형식으로 또는 딕의 경우에는 환각적 환영들의 형식으로 인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세속을 초월한 또는 외계의 신과 융합된다.

 

"주해" 전체에 걸쳐 일원론적 우주관(이 관점에 따르면 우주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을 뿐인데, 그것은 자연으로서의 신이라는 스피노자의 관념, 과정으로서의 실재라는 화이트헤드의 관념, 그리고 "진리는 전체"라고 하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딕의 언급에서 볼 수 있다)과 이원론적 또는 영지주의적 우주관(이 관점에 따르면 하나는 사악하고 나머지 하나는 인자한 두 개의 우주적 힘이 갈등 상태에 있다) 사이의 긴장이 있다. 딕에 대한 나의 독법에 따르면 후자의 관점이 승리한다. 이것은, 가시적인 현상적 세계는 타락한 상태이고 사실상 일종의 감방, 새장 또는 동굴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기독교는 형이상학적 일원론이라는 점인데, 여기서 모든 것은 신의 작업이기 때문에 창조의 모든 측면들―가장 더럽고 가장 불쾌하더라도―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기독교도들의 의무이다. 악은 실체적인 것이 전혀 아닌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히 선한 신에 의해 초래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맞서, 영지주의는 이 세계를 창조한 거짓 신―일반적으로 "조물주"라고 불리는―과 이 세상에서는 알 수 없는 외계의 참된 신 사이의 본원적인 이원론을 선언한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에게 악은 실체적이고 그것의 증거는 이 세계이다. 가능한 한 창조물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타액으로 씻곤 했던 한 급진적인 영지주의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영지주의는 세계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에 의한 외계의 신에 대한 숭배이다.

 

딕의 영지주의의 새로운 점은 신이 정보를 통해서 우리와 소통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딕의 지속적인 주제이며, 그는 우주를 정보로 간주하고 신도 정보로 간주한다. 그런 정보는 그가 직교 시간(orthogonal time)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이론과 연결된 일종의 정전기적 생명을 갖는다. 직교 시간은, 시간을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뻗어 있는 현 시점들의 연쇄로서 간주하는,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표준적인 선형적 개념과 어긋나는 풍성하고 기묘한 시간 관념이다. 딕은 직교 시간을 양쪽 끝이 무한히 펼쳐지는 선이라기보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원으로 설명한다. 눈길을 끄는 이미지로, 딕은 직교 시간이 "LP 위의 홈들이 이미 연주되었던 음악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존재했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늘이 홈들을 지나간 후에 홈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비틀즈의 "어 데이 인 더 라이프(A Day in the Life)"에서 감쇠함에 따라 더욱 더 많은 모멘텀과 음악적 복잡성을 결집시키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마지막 구절과 같다.  달리 말해서, 직교 시간은 토탈 리콜을 허용한다.

 

그의 더 격정적인 순간들―정직하게 말해서, 그것들은 꽤 자주 일어난다―에서 딕은 직교 시간이 황금시대, 즉 타락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이자 원죄가 있기 이전의 시대가 복귀할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단언한다. 또한 그는, 직교 시간에서는 미래가 현재로 되돌아와서 실현된다. 확실히 이것 때문에 딕은 자신의 소설이 진리가 될 것이라고, 즉 미래가 자신의 책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현대 세계의 보안 기술이 이미 날마다 더욱 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의 2055년과 어떻게 흡사한 듯 보이는지에 관해 잠깐만 생각해보면, 딕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는 미래를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해"의 끝부분에서 딕은 1958년에 영어로 먼저 출판되었던 멋진 책인 한스 요나스의 "영지주의적 종교(The Gnostic Religion)"로부터 자유롭게 차용하고 인용하기 시작한다. 요나스의 책이 얼마간 앞에서 언급한 토기처럼 딕에게 말하는 까닭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요나스는 신성한 빛살에 의한 계몽, 신에 대한 신비스러운 영지(신에 대한 지식, 영지주의적 신조), 신성한 실재의 직접적인 이해라는 관념의 힘과 지속성―역사적인 그리고 개념적인―을 보여준다. 영지주의의 핵심은 신과의 이런 직접적인 접촉인데, 그것 자체가 영혼을 신성화하고 영혼으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비열한 세계―아무것도 아님―를 볼 수 있게 한다. 요나스에게 영지주의의 핵심은 허무주의의 경험인데, 즉 현상계는 아무것도 아니며 참된 세계는 현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 비밀스러운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신성한 조명이 필요하다.

 

딕의 "주해"는 영지주의적 세계관에 관한 독특하게 강력하고 날카로운 재서술이다. 옳든 그르든―명백히 나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내가 보기에 영지주의는 여전히 비판하기 전에 이해할 필요가 있는 강력한 유혹을 나타낸다. 딕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데, "주해"의 도처에서 이와 같은 행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비밀 속에 비밀이 있다. 제국은 하나의 비밀(그것의 존재와 그것의 힘, 그것이 지배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은밀한 비합법적인 기독교도들이 그것에 대항했다. 그래서 은밀한 비합법적인 기독교도들을 발견한 덕분에 그들이 비합법적으로 존재한다면 더 강한 사악한 것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즉각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딕의 영지주의 정치학에 관한 간결하고 계시적인 진술이다. 여기서의 논리는, 발렌티누스파 교도들과 마니교도들처럼 초기 기독교 시기의 다양한 영지주의적 분파들에서 카타리파 교도들과 몇몇 역사가들이 13세기와 14세기에 유럽 전역의 보이지 않는 제국과 같았다고 주장한 몹시 두려웠던 "자유 정신 이단(Herecy of the Free Spirit)"에까지 이르는 신비주의적 이단 형식들에 가깝다.

 

이단의 핵심은 원죄의 부정에 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있으며, 세계는 참된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성 바울이 유사영지주의적인 한 순간에 "이 세계의 신"이라고 부른 사악한 조물주의 창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계라는 사악한 환영을 꿰뚫고 외계의 신의 참된 세계를 봐야 한다. 현상계는 나쁜 신의 창조물이고 영지주의자들이 "아르콘"이라고 불렀던 조물주의 대리자들, 딕이 예지적으로 "제국"이라고 부르는 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대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우리가 죄의 참된 세속적 원천을 식별하게 될 때 현상계와 결별함으로써 신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과정이 끝날 무렵에 우리는 스스로 신이 되어 세계를 통치하는 사악한 제국의 지배를 폐기할 수 있다. 신비주의적 경험과 정치적 반란 사이의 이런 연결은 "주해"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제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제국의 노예들이고, 세계는 우리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는 감옥, 즉 영지주의자들이 "창조주 신의 보잘것 없는 감방"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관념이다. 그것은 딕이 BIP, 즉 깜깜한 철의 감옥(Black Iron Prison)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PTG, 즉 야자수 정원(Palm Tree Garden)의 영적 구속에 대립되는 것이다.

 

비밀 엄수에 대한 강조를 주목하자. 첫번째 비밀은 세계가 함께 일종의 비밀 집단을 형성하는 사악한 제국 또는 정부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자체는 돈으로 연결된 기업들의 자치 조직이고 기업 지도자들과 주주들의 이해관계에만 봉사한다. 두번째 비밀―"비밀 속의 비밀"―은 빨간 약을 삼켜서 마야의 장막을 찢어버린 소수들에 속한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매트릭스"―제3부의 글을 좇는 다면, 영지주의적 세계관의 놀라운, 심지어 걱정스러운 몇 가지 현대적 함의들에 이를 수 있는 대중문화적 암시―를 보았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