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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칠리: 필립 K. 딕, 과학소설 철학자, 1부-빛나는 물고기에 관한 명상

 

- 아래 글은 현재 뉴욕 뉴스쿨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사이먼 크리칠리(Simon Critchley)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소설가로 알려진 필립 K. 딕(Philip K. Dick, 1928-1982)의 철학자적 측면에 관해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에세이 중 1부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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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빛나는 물고기에 관한 명상

 

믿고 있을 때, 나는 광인이다. 믿고 있지 않을 때,

나는 우울증을 앓는다.         

                                      ― 필립 K. 딕(Philip K. Dick)

 

필립 K. 딕은 거의 틀림없이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소설 작가이다. 유성같은 짧은 경력동안 그는 121편의 단편소설과 45편의 장편소설을 저술했다. 생전에 그의 작품은 성공적이었는데, 1982년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영향력이 급격히 증가했다. 딕의 작품은,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가 원작), "토탈 리콜(Total Recall)",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스캐너 다클리(A Scanner Darkly)", 그리고 가장 최근에, "컨트롤러(The Adjustment Bureau)" 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그의 작품들에 대한 현기증이 날 정도로 성공적인 할리우드의 각색을 통해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딕을 사상가로 여기는 사람을 거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류일 것이다.

 

딕의 생애는 오래 전에 광기와 약물 중독에 관한 화려한 이야기들이 가미된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런 전설을 딕의 문학적 탁월함이라는 특성에서 전환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조너선 레뎀(Jonathan Lethem)은, 내가 보기에 올바르게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딕은 전설적 인물이 아니었으며 광인도 아니었다. 그는 우리들 속에서 살았으며 천재였다." 그렇지만 딕의 생애는 그의 작품에 대한 어떤 평가에도 계속해서 상당히 많이 끼어든다.

 

여기서 모든 것은 "황금 물고기"라고 줄여서 언급하는 한 사건에 의존한다. 1974년 2월 20일, 딕은 깊숙이 파고 든 사랑니 때문에 치과의사를 찾아가서 펜토탈나트륨을 투여받은 후에 특별한 계시의 힘에 강타당했다. 한 젊은 여성이 캘리포니아 주 풀러턴(Fullerton) 시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다르본 알약 한 병을 배달했다. 그 여성은 1960년대 말의 예수 대항문화 운동이 채택했었던 고대 그리스도교 상징인 황금 물고기 장식을 단 목거리를 걸고 있었다.

 

딕의 설명에 의하면, 그 물고기 장식은 황금색 빛살을 방출하기 시작했고, 갑자기 딕은 그가 플라톤에 동의하며 상기라고 불렀던 것―지식 전체에 대한 회상 또는 토탈 리콜―을 경험했다. 딕은 철학자들이 "지성적 직관(intellectual intuition)"―마음에 의한 현상의 영사막 배후에 놓여 있는 형이상학적 실재의 직접적 지각―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을 얻었었다고 주장했다. 칸트 이래로 많은 철학자들이 그런 지성적 직관은, 엠마누엘 스베덴보리(Emmanuel Swedenborg)의 천사 군집의 환영처럼 일반적으로 종교적 경험 또는 신비한 경험으로서 부정한 몽매주의의 탈을 쓴 인간들만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칸트가 자아가 문자 그대로 신에 홀리는 상태인 일종의 집단적 열광을 나타내는 "die Schwarmerei"이라는 멋진 독일어 낱말로 불렀던 것이다. 딕은, 칸트가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현상계와 본체계의 상이한 영역들에 두었던 주의 깊은 한계들과 균열들을 퉁명스럽게 일축하면서, 그가 "진정한 실재"라고 불렀던 것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을 주장했다.

 

그러나 황금 물고기 일화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후 여러 날과 여러 주 동안 딕은 환상적인 광선 쇼로 인한 밤새도록 계속되는 현란한 여러 영상을 경험했으며 사실상 즐겼다. 팔 년 후에 53세로 죽을 때까지 이런 최면적 일화들은 환청과 예지몽들과 함께 끊어졌다 이어졌다 계속된다. 딕이 "호 온(Ho on)" 또는 "오 호(Oh Ho)"라고 불렀던, 성급하고 성마른 목소리로 다양한 영적인 심오한 쟁점에 관해 그에게 말하는 토기를 비롯하여 매우 기묘한 일들이 많이―너무 많아서 여기에 나열할 수 없다―일어났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나쁜 산이었던가 아니면 좋은 펜토탈나트륨이었던가? 딕은 진정으로 광인이었던가? 그는 정신병자였던가? 그는 정신 분열증 환자였던가?(그는 이렇게 적었다. "정신 분열증 환자는 실패한 도약이다.") 그 환영들은 단순히 몇몇 사람들이 T.L.E.―측두엽 간질(temporal lobe epilepsy)―라고 부르는 일련의 뇌 발작의 효과였는가? 이제 우리는 뇌에 관한 어떤 더 나은 신경과학적 이야기로 딕의 계시적 경험을 설명하고 해명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인과적 설명들이 딕이 서술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현상들의 풍부함을 놓치고 그것들을 서술하기 위한 그의 독특한 수단도 간과한다는 점이다.

 

사실은, 그가 "2-3-74"라고 부르게 되는 것의 사건들(그해 2월과 3월의 사건들)을 경험한 후에 딕은 자신의 여생을 자신에게 일어났었던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바쳤다는 점이다. 딕에게 이해는 글쓰기를 의미했다. 딕은 2-3-74에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만성 글쓰기 중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증상을 겪으면서 자신의 경험에 관해 8,000쪽 이상의 글을 썼다. 그는 밤새도록 글을 쓰곤 했는데, 행간을 띄우지 않은, 여백이 좁은 20쪽을 한번에 생산하였으며 대체로 손으로 적었고 특별한 도표들과 수수께끼 같은 스케치 그림들이 산재했다.

 

사후에 대략 91개의 폴더로 정리된 산더미 같은 미완성 원고는 "주해(Exegesis)"라고 불렸다. 그 단편들은 딕의 친구 폴 윌리엄스(Paul Williams)에 의해 정리된 후에 여러 해 동안 캘리포니아 주 글렌 엘렌(Glen Ellen)에 소재하는 그의 주차장에 보관되었다. 마침내 2011년 말에 황금 물고기가 표지에 새겨진, 멋지게 편집된 이 텍스트의 선집이 출판되었는데, 그 책의 쪽수는 엄청나게도 950쪽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딕은 이렇게 쓴다. "그런데 내 주해는 내 자신의 이해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 책은 가장 특별하고 방대한 자기해석 행위,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듯 보이는 2-3-7의 사건에 관한 명백히 끝없는 사유이다. "주해"는 흔히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과대 망상증의 발작들을 다루곤 하지만, 진정으로 탁월한 행들도 많이 실려 있으며 철저하고 완전히 무장 해제시키는 성실성으로 특징지워진다. 때때로, 앞의 인용 구절에서처럼, 딕은 낙담과 절망의 울증에 빠진다. 그러나 때때로, 후대의 시몬 마구스(Simon Magus)처럼, 그는 자아가 팽창하여 신과 통일되는 조증에 사로잡힌다. "나는 신의 마음 속에 있다."

 

2-3-74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해하기 위해 딕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고 가장 좋아했던 자원들을 이용했다. 이것들은 1974년 말에 딕이 구입했던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15판의 완전한 전집과 1967년에 8권의 멋진 책으로 출판되었던 폴 에드워즈(Paul Edwards)의 거의 틀림없이 탁월한 "철학 백과사전"―여태까지 생산된 가장 풍부하고 가장 방대한 철학적 문헌들 가운데 하나―이었다. 딕은 두서없이 다방면으로 읽었다. 백과사전들 덕분에 딕은 광범위한 강박에 어떤 형식적이고 체계적인 정합성을 부여하는, 명백히 지도받지 않은 빠른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백과사전의 다양한 항목들을 훓어 보면서 딕은 모든 곳에서 관념들의 연결과 대응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특히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플라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헤겔, 쇼펜하우어, 마르크스,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그리고 한스 요나스―의 원전들과 마주쳤다. 그의 해석은 때때로 상당히 황당하지만 흔히 설득력이 있다.

 

이것 덕분에 나는 중요한 지점에 이른다. 딕은 순전한 독학자였다. 그는 1949년에 버컬리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한 학기도 마치지 않았는데, 몇 주 동안 그 대학에서 철학 10A 강좌를 듣다가 그만두었다. 딕이 담당교수에게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형상론―딕에게 그것의 진리는 나중에 2-3-74의 경험에 의해 증명되었다―의 타당성에 관해 물었을 때 드러난 그 교수의 무지와 불관용에 진저리나서 그는 교실을 떠났다. 딕은 분명히 철학자 또는 신학자로서 훈련받지―나는 학자들을 길들여진 애완동물인 것처럼 들리게 만드는 "훈련받다"라는 동사를 혐오하지만―않았다. 딕은 아마추어 철학자였고, 또는 "주해"의 편집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에릭 데이비스(Erik Davis)의 어구를 차용하면, 그는 가장 빛나는 것, 즉 차고 철학자였다.

 

딕은 학문적이고 학술적인 엄밀함에 있어서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상상력과 풍부한 횡적인 누적적 연상의 힘으로 넘치게 보상한다. 그가 더 많이 알았었더라면, 그 때문에 그는 덜 흥미로운 관념들의 연쇄를 산출했었을 것이다. "주해" 후반부의 한 진술에서 딕은 이렇게 쓴다. "나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철학자이지 소설가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계속해서 덧붙인다. "내 글쓰기의 핵심은 예술이 아니라 진리이다." 우리는, 철학자의 고전적인 목적인 진리에 대한 관심이 허구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허구의 작업으로 판단되는 명백한 역설을 대면하고 있는 듯 하다. 딕은 자신의 소설 쓰기를 자신이 진정한 실재로 식별하는 것을 서술하고자 하는 창의적인 시도로 여겼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기본적으로 분석적이지 창의적이지 않다. 내 글쓰기는 그야말로 분석을 다루는 창의적인 방법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