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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사 바티스토니: 오늘의 서평-긴급상황


긴급상황: 가속적 기후변화의 시대를 위한 정치를 상상하기

States of Emergency: Imagining a politics for an age of accelerated climate change


―― 알리사 바티스토니(Alyssa Battistoni)


기후변화는 거의 내 평생 동안 아메리카의 정치적 쟁점―1988년에 제임스 한센이 상원에서 지구 온난화의 현실을 처음 증언했다―이었지만, 지구에 대한 전망은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다. 먼저 기후변화는 먼 문제로, 미래 세대들이 바로잡을 문제로 논의되었다. 그 다음에 그것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문제로, 세계의 어딘가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논의되었다. 이제는 기후변화가 오늘날 합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데, 하지만 우리는 그것과 관련하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킴 스탠리 로빈슨(Kim Stanley Robinson)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시대를 망설임(Dithering)의 시대라고 불렀고, 아미타브 고쉬(Amitav Ghosh)는 거대한 혼란(Great Derangement)의 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무언가가 지독히 잘못되어 버렸다. 수백만 명의 삶을 위협하고, 아마도 지구에서 인간 생명의 미래도 위협하는 것으로 널리 인식되는 문제가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한동안 민주주의가 원흉인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민주주의적 정치는 미래에 놓여 있거나 국경을 넘어서는 문제들을 다루는 데 결코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기후변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정말로 너무 복잡하므로 전문가들에게 맡겨 두는 것이 더 낫다. 기후변화는 너무 어려운 주제이기에 정치 운동 동안 거론할 수 없다. 그렇게 우울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진정으로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고, 탄소 배출을 감축하려면 생활 수준을 낮추어야 한다고 제 정신으로 요구할 정치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자본주의가 정치적 쟁점으로 다시 거론되면서 그것 역시 비난을 받는다. 현재 정치적 문제는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는 오일머니의 볼모로 잡혀 있고 정치인들은 오일머니에 매수되었다고 한다. 자본주의 체계가 몇 가지 수정 방안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는 자본가들도 있다. (일론 머스크처럼 화성으로 떠날 계획을 하고 있는 자본가들도 있는데, 정말로 거대한 혼란이다.) 문제의 근원으로서 민주주의를 기업으로 교환하는 것은 환영해야 할 전개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대한 진지한 정치적 사유는 여전히 공급 부족 상태에 있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후변화에 대해 걱정하지만, 기후변화를 자기의 정치적 사유 및 실천의 핵심에 두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적 이론에 대한 지오프 만(Geoff Mann)과 조엘 웨인라이트(Joel Wainwright)의 새로운 저작 <<기후 리바이어던(Climate Leviathan)>>은 작지만 점점 성장하고 있는 좌파의 기후 저작집에의 환영해야 할 부가물이다. 그 저작은 기후변화의 정치적 차원들을 마무리 절의 한두 단락으로 밀어놓는 대신에 이해하려고 명시적으로 노력하는 책이다. 그 책은 또한 기후정치에 관한 대부분의 저작들과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저자들은 우리가 왜 탄소 배출을 억제하려고 행동하지 않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임박한 생태적 위기들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정치적 시나리오의 종류들에 관심이 있다.


기후변화는 장래에 인간의 삶과 전지구적 정치에 매우 중요할 것이므로 그것에의 대응이 매해 연말에 유엔에서 발표되는 성명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세계 질서 전체를 구성할 것이라고 만과 웨인라이트는 주장한다. 이런 새로운 세계를 형성할 때 좌파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기댈 수 있는 "정치적 도구와 전략, 전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기후변화는 새로운 문제이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문제이지만 자유와 평등, 정의에 대한 좌파의 전통적인 투쟁에서 본원적으로 벗어날 것을 사실상 요구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새로운 판본들의 친숙한 딜레마들을 제기할 뿐이다. 우리의 정치 사상이 좌파가 기후변화에 대응하여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통찰을 직접 제공하려고 기후변화를 다룰 필요는 없고, 오히려 우리가 현재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항해할 수 있으려면 오래된 관념들을 새로운 방향들로 전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목표를 향해 <<기후 리바이어던>>은 그람시부터 헤겔까지, 칸트에서 나오미 클라인까지 다양한 정치 사상에 관여한다. 그러나 제목이 시사하듯이, 그 책의 핵심에 있는 것은 토머스 홉스인데, 그의 <<리바이어던>>은 여전히 근대 국가들을 떠받치는 주권에 관한 기초적인 저작이다. 홉스는 잉글랜드 내전으로 갈가리 찢긴 국가를 목격하면서 그런 불쾌함과 야만성을 겪는 것보다 전능한 주권자의 권위에 자기의 자유를 양도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홉스 시대에는 그런 주권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서술하면서 홉스는 곧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 정치적 형식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들이 이런 리바이어던에 대해서 생각할 때 활용한 다른 핵심적 자원은 독일의 정치이론가이자 나치 동조자였던 칼 슈미트인데, 그는 홉스에 의존하여 독자적인 주권론을 구성했다. 일상적인 의사결정은 법에 의해 관장되지만 긴급사태가 초법적 행위를 요구하는 순간에는 주권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슈미트는 주장한다. 슈미트에게는 주권자가 필요하다고 간주될 때 공동체의 적들에 맞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여기서 주권자는 국가로 하여금 자기의 친구들을 보호할 때 법을 무시할 수 있게 만드는 정치적 권력으로 이루어진다.


홉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보호를 받는 대신에 이런 극단적인 지배 형식을 수용한다. 이탈리아의 이론가 조르조 아감벤이 지적하는 대로, 무정형의 "테러와의 전쟁"을 구실로 "예외상태"가 표준이 되어버렸던 부시 시대 동안 좌파는 슈미트를 재발견했다. 그러나 이런 국가관은 기후변화의 결과로서 발생할 그런 종류의 긴급사태 정치에 대한 생각으로 거의 확대된 적이 없다. 홉스와 슈미트에 기대어 저자들은 이런 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하는데, <<기후 리바이어던>>은 "생명을 구조한다는 명목으로 지휘권을 장악하고 긴급사태를 선언하며 지구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새로운 주권적 권위를 위한 조건을 생태적 파괴가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 상상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국가적 규모라기보다는 오히려 행성적 규모에서 고찰된다.

그렇지만 이 같은 주권자는 여전히 맹아적인 것이어서 다른 정치적 형식들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기후 리바이어던>>의 핵심에 있는 것은 저자들이 기후변화에 대응하여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는 네 가지 유형의 정치적 구성체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행성적 주권자―홉스가 추측한 대로 반드시 개별적 지배자일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패권적 권력자다―가 관장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계일 것이다. "기후 마오"는 국민국가나 행성의 수준에서 주권자가 관장하는 반자본주의적 체계일 것이다. "기후 베헤모스"는 국민국가의 전제적 범위 안에 한정된 자본주의적 체계다. 그리고 "기후 X"는 자본주의와 주권 둘 다를 거부하는 체계로서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가능한 미래는 대단히 어설픈 시나리오임을 만과 웨인라이트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의 탄소 목표를 지나치고 기후변화의 영향이 점점 더 파괴적인 것이 됨에 따라 이 시나리오들 가운데 하나가 지배적인 정치 양식으로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승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나리오는 기후 리바이어던이라고 저자들은 생각한다. 결국 그것은 이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파리 협정 같은 국제 협약들과 유엔당사국총회(COP) 같은 전지구적 기관들이 그런 상황을 집약적으로 나타낸다. 현재 이런 기관들은 홉스적 의미에서 주권을 갖추고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은 명시적으로 국제적인 것으로서 주권 국민국가들 사이의 작용을 조정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수 세기 동안 예상된 주권 형식을 가리키고 있다고 만과 웨인라이트는 생각한다. 칸트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이어지는 사상가들은 전쟁 위협에 대응하여 세계국가를 전형적으로 상상했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생태적 재난의 시대에 바로 그런 세계국가일 것이다.


온도 상승은 지진해일과 허리케인에서 기근과 난민 위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긴급사태들을 초래할 것이고, 그런 긴급사태를 구실로 강대국들이 예외상태를 선언함으로써 자국의 세력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주요한 기후 재난으로 인해 북부의 자본주의적 국가들은 유엔이나 유럽연합 같은 초국가적 기관을 거쳐 조치―지구공학에까지 이르고 지구공학을 포함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매년 개최되는 유엔당사국총회에서 협정이 체결되기를 요청함으로써 많은 기후 활동가는 기후 리바어어던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그것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런 기관들은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만과 웨인라이트는 주장한다. 그것들은 자본주의를 관리하려고 창립되었으므로 파국적 온난화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계속해서 자본주의를 관리할 것이다.


지난 이십 년 동안 전지구적인 자본주의적 기관들이 기후정치의 주요 현장이었지만 기후 리바이어던은 경쟁자가 있다. 기후 베헤모스는 기후변화에 관한 행성적 포럼들의 전지구적 엘리트주의를 외면하는 "반동적 대중주의"―자기가 "파리가 아니라 피츠버그의 시민들을 대표하도록 선출되"었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주장이 완벽히 요약하는 원동력를 나타낸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나렌드라 모디의 인도, 유럽연합에 회의적인 우익 정당들이 급증하는 유럽 전역에서 볼 수 있듯이, 기후 베헤모스의 지지자들은 국제적인 엘리트들과 정치 체제를 고수하기를 바라는 화석연료 자본가들, 소시민적 반동주의자들, 환멸을 느낀 노동자 계급 인민들이 뒤섞여 있다. 기후 베헤모스는 민족-국민주의, 종교, 남성성, 과학의 부인이 뒤섞인 모순적이지만 유력한 혼성물이어서 강력하지만 궁극적으로 불안정한 형식이 된다. 기후 베헤모스는 소진될 가능성이 있다고 만과 웨인라이트는 주장하지만, 그 동안에 그것은 충분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기후 마오와 기후 X로 대표되는 혁명적 가능성들은 덜 직접적으로 임박하여 현재 파편적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기후 마오는 기후 붕괴를 다루기 위해 재빨리 행동하는 비자본주의적 국가가 이끄는 혁명적 전환을 서술한다. 만과 웨인라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기후 마오는 마오라는 혁명가를 좇지만 "집단의 미래를 위한 정당한 공포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점에서 로베스피에르와 레닌도 좇는데, 행성적 주권자의 권력을 자본의 권력과 대항시킨다. 즉, 기후 마오는 궁극적으로 행성의 수준에서 탄소 배출을 감축시키고 기후 긴급사태를 다루려고 작동하는 "권위주의적 국가 사회주의들"의 갱신을 예고한다.


중국이 기업과 시민을 공히 일방적으로 제약하는 상황이 이 같은 미래―전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얼핏 보여준다. 사실상 만과 웨인라이트는 중국이 현재 기후 마오를 향하는 도중에 있지 않음을 주장하려고 노력한다. 공산당은 배출을 최소화하려고 몇 달 동안 제철소를 폐쇄할 수 있지만, 중국을 공산주의적 국가로 서술하는 것은 더 이상 그렇듯하지 않다. 오히려 기후 리바이어던을 특징짓는 국제적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 서양의 자본주의적 강대국들과 협력하는 데 전념했다(예를 들면, 대단히 찬사를 받은 버락 오바마와 시진핑의 교섭을 생각하자).


그럼에도 만과 웨인라이트는 아시아에서만 가까운 미래에 기후 마오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라틴 아메리카가 급진적인 생태정치의 더 강력한 유산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아시아만이 기후변화의 파괴적 효과로 좌절될 가능성이 있는 기대를 품고 있는, 대단히 많은 농부, 프롤레타리아, 잉여 인구와 결합된 강력한 국가들과 주요 경제들의 필요한 조합을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시아에서만 세계의 자원 사용에 유의미하게 영향을 미칠 방식으로 국가와 경제적 권력을 장악하는 대중 운동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미래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것들보다 더 나쁠 것이지만, 저자들에게는 아무것도 특별히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후 X가 나타난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주권 둘 다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적 운동을 가리키는데, "X"는 미지의 것으로의 여행을 의도적으로 시사한다. X의 의미는 그 책 전체에 걸쳐서 분간되더라도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만과 웨인라이트는 마침내 그것의 세부를 탐구한다.


기후 X가 또한 그 책의 명쾌하고 흔히 번득이는 분석이 막히는 지점임을 깨닫는 것은 전적으로 놀랍지는 않더라도 실망스럽다. 실존적으로 위협적이고 본질적으로 미증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절한 정치를 고안하는 것은, 저자들이 거듭해서 인정하는 대로, 대단히 힘든 과제이므로 그들이 기후 X가 어떤 모습일지 너무 자세히 서술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명백히 불가능한 문제들을 통과하는 가능한 경로들을 예시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서 프로그램적이기보다는 느슨한 착상들의 집합, 즉 세 가지 원리, 두 가지 "구멍", 두 가지 궤적을 제시한다. 현대의 기후정의 운동뿐 아니라 좌파의 전통에서 비롯된 세 가지 원리는 평등, 민주주의, 연대다. 평등은 우리가 모두 지구를 공유하고 있다고 확언하고,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의 포함과 존엄"을 보증하며, 연대는 다양한 삶의 방식, 즉 "다세계의 세계"를 긍정하면서 지구나 생명을 보존하기라는 공동의 대의를 인정한다.


두 가지 구멍은 처방적 확실성 대신에 좌파 실천을 위한 잠정적인 가능성들을 제시한다. 첫 번째 구멍은 진행 중인 혁명적 사유와 실천을 위해 공산주의적 미래를 자세히 서술하지 않으려는 마르크스의 망설임을 고무한 "전면적 거부"에서 나타나고, 두 번째 구멍은 확실히 우리 가운데 이미 있는 "위기를 증언"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기후 X를 정초하는 두 가지 궤적은 이런 원리와 가능성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더 장기적인 역사들이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 비롯되는 좌파의 반자본주의적 전통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토착적이고 반식민주의적 운동들, 지식 형식들, 삶의 방식들에서 나타나는 주권에 대한 대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두 번째 궤적은 "다르게, 본원적으로 다르게 살기"―그저 21세기를 피상적으로 더 녹색으로 만듦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땅과 지구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전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됨으로써를 위한 몇몇 자원도 제공한다.


이 같은 막연한 제안이 시사하는 대로, 만과 웨인라이트는 기후 X를 완전히 알아낸 척을 하지 않는다. 기후 X의 주형에 다소 들어맞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운동들의 사례들은 여전히 자본주의도 전복하지 못하고 주권도 전복하지 못함을 그들은 인정한다. 1994년에 멕시코 국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후에 농촌으로 퇴각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기후 X의 유망함에 대한 전망뿐 아니라 그것의 한계에 대한 전망도 제공한다. 공동체 전체가 국가의 세력 범위에서 물러나서 독자적인 원칙에 따라 살아가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국가의 권력에 둘러싸여 있고 포획되어 있다. 이런 입장에서 그런 공동체가 기후변화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확실히 불분명하다. 이런저런 모순들 탓에 독자들은 최소한 일은 처리하는 기후 리바이어던이나 기후 마오에 공감하게 될 것임을 만과 웨인라이트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난제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자본주의적 비주권을 역설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아도르노가 말한 대로, "그것은 도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결론은 좌파의 전략적 사유를 요구하는 그 책의 서두와 뚜렷히 어긋나는데, 빈틈없는 분석이 상황은 다르게 되어야 하므로 다르게 될 수 있다는 반복된 언명으로 대체된다. 정확히 어떻게 다르게 되는지는 신경쓰지 마라.


"우선 해야 할 일은 집단적 태업과 파업으로 탄소 배출을 급격히 감축하기 위해 조직화하는 것이다"라고 만과 웨인라이트는 주장한다. 그렇지만 거의 즉시 그들은 이 입장―너무 유토피아적인 입장―에서 물러선 다음에 또 다시 비틀거리며 나아가는데, 결국 우리는 유토피아주의자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고 그들은 설명한다. "더 많은 동일한 것은 선택지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그들이 옳다. 그러나 후속적 논의도 없이, 거대하고 직접적인 화석연료 사용에 기반을 두고 있는 전지구적 경제를 종식시키는 수단으로서 즉각적인 대규모의 태업과 파업을 요청하는 것은 기껏해야 희망적 사고로 기록된다. 때때로 이것은 유토피아적일 뿐 아니라 부당하게도 그렇다. 만과 웨인라이트가 주장하는 대로 상황이 나쁘다면―그리고 상황이 나쁘다―원칙에 입각한 거부와 삶에 대한 태도는 과거와 달리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대부분의 기후정치의 "두드러진 상상력 부족"에 대응하는 방책이 상상력이 풍부한 환상으로 도피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희망이 없다.


마찬가지로, 주권에 대한 토착적 접근방식들에 유의하라는 요청은 대체로 탐구되지 않은 채로 있다. 토착 정치가 화석연료 하부구조에 맞선 투쟁에서 특히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주권이나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들 때문만이 아니라 토착 집단들이 전략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지에 대한 원주민의 권리 주장은 파이프라인을 막는 데 유용하고, 특히 캐나다의 퍼스트 네이션스 집단들은 양도되지 않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재주장하는 공격적인 법적 운동을 개시했다. 비슷하게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토착민 권리는 그 지역에서 새로운 석유 또는 채광 계획에 맞선 투쟁의 유력한 법적 도구임을 입증했다. 이런 복잡한 정치적 노력은 더 실질적인 분석이 필요한데, 그것은 비주권성에 대한 환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런 노력의 교훈은 다른 정치적 투쟁에 쉽게 전이되지 않는다. 자결권을 위한 이런 기획은 그것이 항상 동조되지는 않지만 때때로 동조되는 기후 운동을 얼마나 멀리 데리고 갈 것인가? 그런 기획은 유사한 법적 주장이나 문화적 정체성, 정치적 역사가 없는 행위자들에 대해서 어떤 통찰을 품고 있는가?


그런데 주권을 본질적으로 그리고 구제할 수 없게 부당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매우 광범위한 일단의 정치적 가능성을 단호하게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운동들은 국가와 자본 둘 다에 반대하여 동시에 작용해야 하고 예시적으로, 즉 그것들이 야기하기를 바라는 관계들을 모델링함으로써 그렇게 해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사파티스타 같은 운동이 강력하게 억압적인 국가와 전지구적으로 움직이는 자본에 맞서 사실상 싸울 수 없다면, 우리가 왜 그것을 국가와 자본을 무너뜨리기 위한 모형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실제로 사파티스타 해방군 자체는, 최근에 선거 정치를 비롯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양한 전술에 개입했다. 최근에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2018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여 토착 공동체들을 대표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입후보자 마리아 데 헤수스 파트리시오 마르티네스를 승인했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기후변화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의 훨씬 더 장기적인 역사의 일부인데, 유일한 차이점은 현재 우리는 생태적 데드라인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시간 벌기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체하거나 변형시키고자 하는 체계들 내에서 기후 변화가 초래하는 최악의 결과를 완화하기 위해 작업함을 뜻하더라도 그것이 좌파 전략의 필수적인 부분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기후 X를 해명하기의 어려움은 그 책의 유형학의 한계를 반영하는데, 그 책에서는 행성적 주권과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전부-아니면-전무라는 선택으로 제시된다. 이상형을 탐구하는 것은 분명히 밝히는 것일 수 있지만, 현 순간에 더 유용할 것은 이미 존재하는 기후 리바이어던들과 기후 베헤모스들 내에서, 그것들을 통해서, 그것들을 넘어서 작동할 가능성들을 파헤치는 노력인데, 기후 베헤모스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사실상, 퇴각할 징조를 거의 보이지 않는 반동적인 베헤모스들의 밀물에 직면하여, 행성적 주권은 주의를 딴 곳에 돌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확실히 다 죽어가고 있지는 않지만, 행성적 주권이 대기하고 있다고 시사하는 것은 거의 없다.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세계국가에 반대하거나 어떤 정의의 척도를 획득하기 위해 운동은 모든 규모에서 모든 주권 형식에 정말로 반대해야 하는가 ? 국민의 층위에서 베헤모스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좌파 대중주의적 기후 X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가? 행성적 연대를 국제적―반드시 전지구적이지는 않은―기관들을 거쳐 전달할 방법은 없는가? 예컨대, 영국 에너지 산업을 국유화하고 탈탄소화하겠다는 제레미 코빈의 공약과 캐나다에서 민간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에 대한 쥐스탱 트뤼도의 계약 파기 사이의 차이점은 행성을 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지만, 최소한 개시의 지위에 대한 자격은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는 국가들이 자본뿐 아니라 국민들과 관련하여 작용한 방식들은 저자들에 의해 주권에 대한 논증―찬반 논증―으로 붕괴된다.


만과 웨인라이트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얼버무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근에 출판된 생태좌파에 관한 다른 두 권의 책―제이슨 무어와 라즈 파텔의 <<일곱 가지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와  안드레아스 말름의 <<폭풍의 진전>>―도 다소간 같은 지점에서 끝난다. 만과 웨인라이트가 베헤모스라고 명명한 "전지구적 파시즘"이 어떤 생태좌파적 구성체보다 오늘날 훨씬 더 유력함을 모두가 인식하지만, 훨씬 더 큰 소요가 필요함을 내내 암시하면서 기후 정의를 위한 몇몇 운동을 기대함으로써 희망을 고무하려고 한다.


만과 웨인라이트처럼 무어와 파텔도 "인간들이 맺는 관계들을 생명의 그물로 그리고 그 그물 내에서 동시에 재발명하는 계급 투쟁을 위한 로드맵"을 그리기를 거절한다. 대신에 그들은 독자적인 다섯 가지 원리―인식, 회복, 재분배, 재-상상, 재-창조―와 독자적인 운동을 제시한다. 무급 노동, 식민적 전유, 강제적 추출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포괄적인 견해는 투쟁들―토착적 운동 아이들 노 모어(Idle No More), 라 비아 캄페시나가 이끄는 농민 운동, 장애권 활동가들과 아르헨티나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의 훨씬 더 넓은 연합을 반자본주의적이고 기후변화를 가로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들은 또한 "자본주의의 생태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토착민과 원주민 국민들의 "대안적 국민주의들"에서 더 유익한 정치적 구성체가 발견될 수 있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무어와 파텔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긴 역사를 상세히 서술하지만, 문자 그대로 수 세기의 투쟁은 아직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음을 떠올릴 때 결과는 희망을 고무하는 것이 아니라 좌절시키는 것이다. 정확히 무엇이 향후 중요한 몇 십 년을 도대체 다르게 만들 것인가?


그런데 말름의 <<이 폭풍의 진전>>은 정치적 행위주체성에 대해 심각해지자는 환영할 만한 요청을 제기하지만 결국 모험주의에 가까운 비호교론적으로 종말론적인 발언으로 끝난다. "온난화 조건은 긍정적 정치의 죽음을 뜻한다"고 말름은 공표한다. "이제 부정성이 우리의 유일한 기회다." 아마도 이런 까닭에 만과 웨인라이트와 마찬가지로 말름도 발터 벤야민으로 마무리하는데, 말름의 경우에는 존재를 "잡석―잡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뚫고 나아가는 방식을 위해서―으로 환원하는 "파괴적 인물"이라는 벤야민의 관념으로 마무리된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를 파괴하기 전에 화석연료 자본을 파괴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마르크스가 "미래의 음식점들을 위한 조리법"을 작성하는 기획을 비난했을 때 그는 대신에 "실제 사실들의 비판적 분석"을 요청했다. 실제 사실들은 상서롭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기후변화가 제기하는 위협은 우리가 매우 다른 세계, 현재 존재하지 않고 지금까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던 세계, 게다가 미래와 진보에 대해 우리가 현재 품고 있는 관념들을 향해 정향되어 있지 않는 세계를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 저자들은 각각, 기후변화가 제기하는 위협은 현재 제공되는 어떤 것과도 다른 정도와 크기를 갖는 정치적 행동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평소대로 살아가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연의 동학에 대해서 매우 명민한 사상가들이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방법에 좌절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러나 기후변화가 날이 갈수록 위축되는, 예견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정치를 형성할 것이라는 저자들의 주장은 틀림없이 옳다.


그래서 만과 웨인라이트와 가능한 기후 X의 다른 지지자들이 청사진을 그리지 않는 한편으로, 몇몇 어려운 의문들은 대답을 요구한다. 전지구적인 대규모 화석연료 산업이 국가가 강제하지 않은 채 어떻게 해체될 수 있을까? 반주권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운동이 엄청나게 부유한 자들이 세계의 어떤 비교적 안정된 지역으로 몰래 도망치지 못하게 어떻게 막을 것인가? 대규모 태업과 파업이 어떻게 그저 상상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될 것인가? 사적 강제력이 공적 강제력을 대체하기 못하게 막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확실히 많은 좌파 인사는 국가에 대해서 너무 태평한데, 그 까닭은 추정컨대 국가를 먼저 장악한 다음에 의문을 제기하자는 근거에서 비롯된다. 기후변화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그런 종류들의 계획들을 실행하려면 국가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덧붙여 말할 것이다. 복지와 공립학교의 "좋은 국가"와 전쟁과 감옥의 "나쁜 국가"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국가 권력을 유용하게 휘두르려면 실제로 충분한 국가 권력을 획득함을 어떻게 추측하는가? 국가 권력이 우리를 전환하기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국가 권력을 전환할 수 있는가?


이것들은 수사법적 물음들이 아니라 실제적 물음들이고, 긴급한 함의를 품고 있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그런 물음들이 뜻하는 바와 그것들이 중요한 까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것들을 철저히 고찰하기 위한 풍부한 개념적 자원을 제공한다. 이런 물음들은 궁극적으로 이론이라기보다는 실천으로 대답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것도 곧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