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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라지: 오늘의 강연-귀납

 

귀납 - 강연 2

Induction - Lecture 2

 

―― 윌리엄 라지(William Large)

 

지난 주에 과학과 종교 사이의 차이에 관해 언급했다. 그것은 믿음과 사실 사이의 차이로 개념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사실이 무엇인지 더욱 더 탐구할수록, 과학적 탐구의 출발점으로서의 사실의 지위에 대해 더욱 더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상식에 따르면, 사실은 바로 저쪽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저 그것을 관측하며 과학적 이론은 이런 관측들의 집합체일 뿐이지만,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이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은 명료하다. 우리가 사실로 간주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측은 이런 배경 개념성에 의해 형성된다. 이 강연에서는 과학철학의 고전적 형식일 귀납의 문제를 탐구할 것이고, 동일한 장벽을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과학이 이런 사실들을 해석하는 바로 그 방식 때문에 세계에 관하여 과학이 갖추고 있는 지식은 자체적으로 오류가 없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과학적 이론은 관측을 통해서 사실들로부터 얻어지며, 그리고 이것 덕분에 과학적 이론이 믿음과 상이한 것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론이 사실들로부터 얻어지거나 유도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후자에서 전자로 어떻게 이르게 되는가?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시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인 것이다. 사실들이 우리가 해변에서 집는 자갈들과 꼭 마찬가지로 사실들의 집합체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이론이 있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론은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발견하기 전에도 그것들에 관해 무언가를 말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그저 무엇이 시간적 순서로 먼저 오는지 아니면 뒤에 오는지와 관련되어 있기보다는 의미와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논리에 관해 말할 때 유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관심 있는 유일한 것은 이론이 사실들에서 비롯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논리의 복잡한 내용이 아니라 기본 형식만 살펴보면 된다. 래디먼(Ladyman)에서 인용된 한 가지 타당한 연역적 논증은 이렇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p. 52)

 

1과 2는 전제들이고 3은 결론이다. 전제들을 참으로 여기면 결론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래디먼이 적고 있듯이, 전제들을 약간 바꿀 수 있고, 그래서 연역이 틀리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동물들이다.

베스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베스는 사람이다. (p. 54)

 

여기서 중요한 점은, 틀린 것은 바로 논증의 형식 자체라는 것이다. 전제들을 수용하더라도 그것들에서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베스는 어떤 종류의 동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연역적 논증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것은 그것이 진리성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즉, 전제들이 참이고 논증이 타당하다면, 결론도 참이다. 문제는, 그렇게 얻어진 결론은 전제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포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세계에 관하여 부가적인 것을 말해주지 못하고, 그래서 확실히 이것은 과학이 행하는 바가 아니다.

 

이것으로부터, 만약에 과학이 사실들에서 비롯된다면, 논리는 어떤 사실이 참인지 거짓인지 말해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논리적으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점이 당연히 도출된다. 참된 사실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지만(논리는 '진리 보존적'이다), 그것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여부를 알게 되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질 뿐이다. 예를 들어,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한다는 과학적 법칙을 생각하자. 차머스가 논증하듯이, 내가 이것을 얼마나 많이 반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는데, 모든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할 것이라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아래에서 함축되듯이):

 

 금속 x는 열을 받았을 때 팽창했다.

금속 y는 열을 받았을 때 팽창했다.

금속 z는 열을 받았을 때 팽창했다.

모든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한다.

 

과학적 이론이 사실들에서 논리적으로 비롯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떻게 유도되는가? 경험 자체를 통해서, 즉 귀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대답해야 한다. 귀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보다도 연역적 논증과 귀납적 논증 사이의 차이는, 위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후자의 경우에는 언제나 결론이 전제들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할 것이라는 점을 결코 확신할 수 없는데, 이것은 내가 특수한 사례들(이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한다)에서 모든 금속이 그렇다는 보편적 판단으로 움직일 때 내가 단언하는 바로 그것이기 떄문이다.

 

연역적 논증의 경우에 행했던 방식으로 나는 어떻게 나쁜 귀납적 논증과 좋은 귀납적 논증을 판결할 수 있는가? 상식에 따르면, 내가 수많은 특수한 관측들을 겪는다면 나의 보편적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듯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속들이 팽창하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대단히 많은 금속 시편들을 관측하여 그것들이 그렇다는 것을 관측하게 되면, '모든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한다'고 단언하는 것은 정당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연역의 법칙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관측 횟수가 많아야 된다.

2) 관측들이 다양한 조건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3) 예외적 사례가 전혀 없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영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자신의 '새로운 방법'을 고안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방법은 부정적인 것이다. 핵심은, 새로운 연역적 논증을 고안하기보다는 나쁜 논증에 빠지는 것을 회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베이컨의 방법은 몇 가지 최악의 오류들을 회피함으로써 과학을 실천하는 방법에 관한 규칙들이다. 그는 이런 오류들을 '마음의 우상'이라고 불렀는데, 자연 속에서 있지도 않는 질서와 규칙성을 찾아내는 우리의 경향은 종족의 우상이고, 우리 판단들이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언어와 개념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시장의 우상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연에 관한 견해들이 우리의 철학적 및 형이상학적 사유 체계들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은 극장의 우상이다. 이것으로부터 베이컨의 방법의 긍정적인 내용은 이런 우상들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연에 대한 관측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점이 당연히 도출된다. 일반화를 통해서 우리의 관측을 이해하기―이 점에 대해 베이컨은 철학자들을 비난한다―보다는 관측을 통해서 얻은 다량의 정보로부터 일반화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베이컨이 '자연사와 실험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이컨이 관측으로 의미한 바는 그저 바라보기가 아니라 실험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리고 새로운 방법을 낡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방법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실험에 대한 이런 강조이다. 관측의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실험이다. 무엇보다도 그 덕분에 관측이 수량화될 수 있으며, 그 다음에 관측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반복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의 신뢰성에 대해 시험할 수 있게 된다. 그후 논의되는 것은 실험들로부터 얻은 이런 데이터이다. 열에 관한 베이컨의 사례를 활용하자. 먼저 열 현상에 직접적으로 속하는 것들을 나열하는 본질과 존재의 일람표가 있다. 둘째, 첫 번째 일람표와 관련이 있지만 아무 열도 포함하지 않는 현상을 나열하는 일탈과 부재의 일람표가 있다. 그 다음에 어떤 열량을 갖는 양태들이 나열되고 수량화되는 대조의 일람표가 있다. 경험적 방법은 제거의 방법이다. 내가 백색은 열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 다음에 나는 내 일람표들을 검토할 것이고, 모든 열 현상이 백색은 아니거나 또는 백색을 나타내는 어떤 현상들은 뜨겁지 않다는 점 등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백색은 열 이론의 일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제거 과정을 통해서 베이컨은 열이 '부분들의 팽창 운동'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열에 관한 현대적 운동론과 많이 다르지 않다.

 

베이컨은 우리가 관측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들을 직접 지각할 수 없더라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형상들이 우리가 보는 것의 직접적인 물리적 원인이다. 이것은 자연적 현상이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목적인에 대한 거부였다. 예를 들면, 돌이 땅에 떨어지는 것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흙 원소는 지구 중심을 향해 낙하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신학적 설명들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데 적절할 뿐이다(돌과 달리 인간은 욕망을 갖고 있다). 물리적 원인들의 편재성이 17세기의 새로운 경험 과학과 매우 오랫동안 자연에 대한 설명을 지배했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구식 과학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이다.

 

그렇지만 귀납과 관련된 문제들이 존재한다. 우선 우리가 관측하는 것의 물리적 원인이 되는 관측되지 않은 형상들의 지위는 무엇인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은 것으로 어떻게 도약할 수 있는가? 사실상 우리는 운동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베이컨의 방법으로 열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지 아는 것은 가능하지만, 복사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착수할 것인가? 예를 들면, 빛에 관한 두 가지 이론처럼 동일한 가시적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경쟁하는 형태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과학에서 보게 된다. 베이컨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 그는 우리가 관측하는 것을 시험하여 어느 것이 더 성공적인지 알 수 있게 하는 두 가지 경쟁하는 실험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우리가 베이컨의 새로운 방법에 관해 의심할 수 있는 것을 예증한다. 이 경우에 실험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관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들 자체가 아닌가? 베이컨은 과학이란 두 개의 기둥, 즉 관측과 귀납으로 이루어지고, 우리는 아무 편견(마음의 우상)도 없이 자연을 관측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학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많은 특수한 사례들을 관측한 다음에 어떤 법칙을 일반화한다. 그런데 문제는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의 이런 불가사의한 도약을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례들이 일반적 법칙을 생성하는가? 예외적 사례가 있다면 이것은 그 법칙이 더 이상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베이컨이 서술하는 대로의 귀납의 원리와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하나는 어떤 관측도 편견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점을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베이컨이 서술하는 대로의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한데, 이론이 없다면 애초에 무엇을 관측할지 알기 어렵다. 둘째, 많은 관측으로부터 일반적 법칙으로 도약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해 걱정할 수 있다. 이전에 X가 여러 번 일어났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그것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어떻게 알겠는가? 이른바 이런 귀납의 문제는 흄에 의해 도입되었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박한 귀납주의를 지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