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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핼버슨: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구성적 경험론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 XI: 구성적 경험론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XI: Constructive Empiricism

 

―― 대니얼 핼버슨(Daniel Halverson)

 

"우리가 경험 배후에 있는 우리 자신에게 나타내는 것은 우리의 오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바스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 1941 - )은 프린스턴 대학의 네덜란드 출신 미국인 과학철학자인데, 구성주의와 실재론 사이의 중도 노선을 취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내는 구성적 경험론으로 불리는 독특한 형식의 과학적 불가지론으로 유명하다.

 

과학에 대한 구성주의적 해설은 이론의 비용으로 맥락을 강조하는 반면에, 실재론적 해설은 정반대의 접근방식을 취한다. 구성주의자의 경우에 이론은 경험에 관한 유용한 이야기인데, 우리에게 저런 이론이 아니라 이런 이론이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과정의 산물이다. 동일한 사건을 목격하는 세 명의 다른 사람들이 그 사건에 관한 매우 다른 세 가지 이야기들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세 개의 다른 사회들은 경험에 관한 세 가지 상이한 이야기들을 말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은 매우 상이할 수 있지만, 그래도 모두 증거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론은 최소한 세계에 관련된 실재적인 무언가를 행하는 만큼이나 그것이 만들어진 맥락을 서술한다. 모든 이론은 가치들의 어떤 맥락과 어떤 건조 지역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전자는 후자와 분리될 수 없다. 구성주의자들의 경우에 이론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학적] 실재론자들은 과학적 이론들을 대안적 모형들에 배타적이고 어긋나는 실제적 실재에 대한 실제적 서술로 간주한다. 과학적 이론들의 문자 그대로의 진리에 대한 믿음이 그것들의 본성에 대한 합리적 탐구의 유일한 가능한 결과이다. 맥락이 이론을 만들어내지 않는데, 이론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서술하기 위해 창조의 맥락을 초월하는 바로 그 때에 그것은 성공적인 것이다. 과학혁명이 부르봉 왕조 유럽 대신에 명 왕조 중국에서 일어났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뉴턴이 발견한 것과 동일한 운동 법칙들이 있을 것인데, 그것들은 단지 뉴턴의 법칙으로 불리지 않을 것이다. 맥락은 사소하고, 설명적 성공은 심대하다. 이론은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과학적 이미지(The Scientific Image)>>(1980)와 <<법칙과 대칭(Laws and Symmetry)>>(1989)에서 바스 반 프라센은 한 가지 다른 접근방식을 제시했다. 아마도 놀랍게도, 그는 실증주의적 프로그램의 양태들을 부활시킴으로써 그렇게 했다. 과학철학은 이론과 관측, 언어와 논리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해명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반 프라센의 설명에 따르면, 이론의 효용에 대한 신념은 이론의 진리로서의 지위―오로지 이론의 관측에 대한 대응―에 대한 신념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서, 성공적인 이론은 "경험적으로 적절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진리"보다도 더 실용적인 기준이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은 인간의 감각에서 지식은 멈춘다. 직접 관측될 수 없고 장치로만 "검출될" 수 있는 객체나 과정들은 경험적으로 알 수 없는데, 감각 자체가 그것들을 관측하지 않고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치가 관측하며, 감각은 장치가 관측하는 것을 관측한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이 전자의 경우에는 타당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밤에 벽을 끍는 소리, 비명 소리 그리고 후닥닥 달아나는 소리를 듣고, 치즈가 사라져버린 것을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쥐의 존재를 합당하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은, 쥐를 본 적이 없더라도, 원칙적으로 볼 수 있고, 그리고 충분히 오래 기다린다면 아마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거대 강입자 충돌기를 가동하여 힉스 보손의 존재를 요구하는 이론에 정합적인 아원자 잔해를 검출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보손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데, 여러분이 그것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알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절한"지 여부이다.

 

과학이 다루어야 하는 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많은 것이 직접 관측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의 주요한 의문은 "무엇이 자연에 관한 진리인가?"라는 의문이 아니라 "무엇이 경험적으로 적절한 설명으로 간주되는가?"라는 의문이다. 이것은 결국 대체로 맥락의 문제이다. 구성주의자들처럼 "누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 이론을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누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 이론을 사용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설명은 도구와 같은데, 좋은 망치는 세탁용 도구로 사용되지 않으며, 세탁기는 못을 박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은 시간 지연에 대한 좋은 설명이 아니며, 상대성 이론은 약한 핵력에 대한 좋은 설명이 아니다.

 

철학적으로, 이 견해의 이익은 그것 덕분에 철학자는 이미 이해한 이유들 때문에 바람직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의 진리에 관여하지 않은 채 과학적 이론들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그 견해는 동일한 틀 내에서 구성주의 및 실재론을 위한 여지를 제공한다. 비용은 그것이 과학자들이 합당하게 확신하고 좋은 증거가 있는 힉스 보손 같은 어떤 것들의 존재를 불확실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과학과 과학철학은 전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는 없지만, 반 프라센은 구성주의자들처럼 급진적이고 원대한 비판에 관여하지 않는다.